사람들은 개썰매에 대한 로망이 있는 듯하다. 사실 나 또한 그러하다. 북유럽이나 미국 알래스카, 캐나다 등 눈이 많고 추운 지역에서 개썰매가 관광 사업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을 통해 그것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인터넷에 개썰매를 검색해 보면 나오는 글들을 보아도 그렇다. 기계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산업혁명 이전의 과거에는 추운 지역에서 운송 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에 개썰매가 이용되었고 그에 따른 적합한 개의 품종도 개량되었다. 그것이 인간의 일방적인 사용이었는지 인간과 개 사이의 모종의 계약관계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기술 발전 이전의 인간이 개라는 동물로부터 생존에 도움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운송수단으로서의 개썰매는 사라졌을 법도 한데 오히려 관광상품으로 살아남았다. 그것도 꽤나 매력적인 관광상품으로 말이다. 특히나 복잡하고 삭막한 도시 생활에 지친 이들에게 드넓고 광활한, 새하얀 설원 위를 기계 동력의 도움 없이 달리며 대자연을 느끼는 것에 대한 환상은 속세를 떠나 이국적인 여행의 느낌을 충분히 갖게 한다.
미국의 이 낯선 땅에 오고 나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 중에 하나는 개썰매를 경험할 수 있는 지역이 있다는 것이었다. 북쪽으로 네시간여를 차로 올라가면 일리 (Ely)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태곳적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곳으로, 여름이면 문명을 멀리하고 캠핑과 낚시, 카누 여행을 즐기는 사람으로 붐빈다. 한 겨울에는 평균 영하 20-30도를 웃도는 혹독한 추위 가운데 새하얀 자연 속에서 겨울 스포츠와 개썰매를 즐긴다. 개썰매는 반나절이라는 찰나 (?)의 순간으로부터 4내지 6박을 야외 캠핑 (혹한의 추위에서)을 하며 경험하는 코스로 선택할 수도 있다.
한국에 있을 당시에는 개썰매라 하면 북유럽이나 미국 알래스카 지역에만 있는 줄로 막연히 생각했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몸을 담게 된 곳에 개썰매 지역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사족으로 이곳은 미국에서 가장 많은 야생 늑대의 서식지이기도 하다. 이곳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밤에 숙소에서 늑대의 울음소리 (하울링)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가까운 지인은 숙소 앞을 유유히 지나가는 늑대를 마주치고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도 전해주었다. 차 안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밖에서 만났다면 정말 스릴 넘쳤으리라. 그래서인지 이곳에는 국제 늑대 센터 (International Wolf Center)라는 곳도 있어서 야생 늑대의 개체수를 유지하고 늑대 보호와 보존의 중요성을 사람들에게 교육, 홍보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센터에서도 자체적으로 개썰매를 홍보하기도 하는데 늑대와 개썰매를 끄는 개들의 외모적 유사성이 단순한 우연은 아니리라는 합리적 추측이 든다.
개썰매가 있다는 소식에 나도 경험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게 사실이다. 어릴 적 우리 집엔 우연한 교배의 결과로 썰매개를 닮게 된 시골개 바둑이가 있었다. 눈이 수북이 온 어느 한 겨울, 집 뒤의 작은 언덕에 바둑이와 함께 올라가 눈밭을 뒹굴고 뛰놀며 사진을 찍었던 때가 그리워서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까지 북쪽 그 지역을 방문조차 해보지 못했다.
개썰매를 타보진 못했지만, 간접적인 경험으로 썰매개들이 추운 겨울 눈밭에 묶여있는 걸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두꺼운 패딩 점퍼와 목도리, 장갑, 귀마개, 핫팩 등으로 중무장을 해야만 영하 20-30도 추위를 겨우 견딜 수 있는 반면, 털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추위를 맨몸으로 견뎌내는 것을 보면 그 자체로 생명과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이 생긴다. 그런 안쓰러움의 생각은 잠시, 그 혹독한 추위를 견딜 수 있게끔 태어난 이들에겐 오히려 좁은 서울 한복판의 아파트 모노륨 바닥에서 뛰어다니는 것이 더 괴로운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빠진다.
묶여있는 사슬을 풀어서 달릴 수만 있게 해 주길 학수고대하는 모습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어쩌랴. 우리네 인생 또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아니냐'라고 인간의 편에서 변을 해보지만, 개들의 입장에선 인간과 계약할 당시의 조건과 맞지 않는다고 계약 파기를 외치는 울부짖음으로 들리기도 한다.
최근 한국에서 실내 개썰매장이 생겼고 작년부터 겨울마다 운영되고 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했다. 저 멀리 얼음왕국을 가지 않아도 서울 근교에서 개썰매를 경험할 수 있다는 소식만으로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아이템이다.
하지만 눈을 뿌려준다고는 한다지만 빙판 위를 달려야 하고 제한된 공간에서 개썰매의 흉내만 내는 정도의 수준이다. 그 시설로 인해 동물 학대 논란도 야기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내가 나고 자라며 학창 시절을 보낸 곳이라니 더욱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요즘 한국에서는 동물원에 대한 인식도 동물 복지의 측면에서 급변하고 있는 추세에서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동물을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의견과 다른 많은 동물도 상업적으로 이용되는데 왜 유독 개만 가지고 난리냐 라는 의견이 충돌한다.
이 글을 보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실내 개썰매 아이템을 구상, 실행 및 주도한 측에선 아주 좋은 사업 아이템이라고 생각하며 기대감에 부풀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동물 복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고려한 사전 조사 및 의견 수렴, 심사숙고와 철저한 준비에 대한 고민의 흔적 없이 사업을 시행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급증하는 반려견의 유기와 개식용 및 도살의 문제로 이슈가 넘쳐나고 있다. 유래 없는 동물 복지에 대한 관심이 넘쳐나는 때이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춥고 눈이 많이 오는 북쪽 지역에서 탄생한 개썰매는 사람의 생존을 위해 개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출발했다. 어찌 보면 개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일이다. 다른 대체 수단과 기술이 없던 시절, 인류가 생존할 수 있도록 유대관계를 맺은 것이다. 척박한 환경에서 동물을 '이용'해 생존능력을 키운 것을 단지 인류의 뛰어난 업적으로만 치하하기엔 대자연 앞에 인간은 너무 무기력하고 연약하지 않은가. 개썰매를 이용했던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의 삶의 방식과 터전이었다. 그것을 계승하는 측면에서는 한시적으로 개썰매가 관광상품으로 이용되는 것을 너그러이 용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반대 측에서는 보다 근본적으로 동물에게 학대성이 가해지는 개썰매의 문화 자체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개썰매의 문화가 없는 한국에서, 그것도 좁은 실내 공간에서 철저하게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아이템으로 탄생된 개썰매에 대해선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동물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입장에서 지금까지 동물에 대해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행해왔던 일들을 줄여가는 (-) 것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와중에, 동물 복지에 논란이 될만한 일들을 더하는 (+) 것에는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인간에 의해 동물이 무자비하게 학대되고 사용된 역사들이 있지만, 인류가 항상 동물을 이용할 대상으로만 바라본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유대와 공생관계로서 오랜시간을 함께 해왔다. 산업화와 자본주의로 인해 이용과 학대의 사례가 급증했기에 이제는 더욱 올바른 유대관계에 대해 생각해야 할 때이다. 어디까지가 이용이고 공생인지에 대한 의견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예컨대, 집 안에서 키우는 반려견을 생각해보자.
알래스칸 말라뮤트나 시베리안 허스키는 이름만 들어도 추운 알래스카와 시베리아에서 키울 수 있게 '만들어진' 품종이다. 골든 리트리버와 비글은 사냥을 목적으로 개량되었다. 동물의 복지만을 생각한다면 이런 품종을 도시에서 키우는 것 자체가 동물 학대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개가 늑대로부터 가축화되었다고 해서 복지를 위해 개를 늑대로 돌려놓는다거나, 반려견을 다 없애버리자고 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와 문화속에 우리는 현재,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동물을 대해야 하는지를 심사숙고해야 한다. 인간의 유익과 동물 복지의 사이에서 균형을 말이다.
안내견과 같이 서비스견으로 일하는 개들이 스트레스로 수명이 더 짧다는 의견과 그에 관한 연구들도 있지만, 안내견은 시각장애인들에게 물리적이고 육체적 도움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중요한 도움을 준다. 반려견을 이용한 동물 매개 치료들도 마찬가지이다.
반면, 인간의 즐거움과 유흥을 위해 개가 사용되는 경우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인간의 유흥 자체도 우리에게 필수적인 부분이기에 그것을 위해 개를 이용하는 것은 서비스견을 이용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라는 논리를 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화하기엔, 인간은 도덕적 존재로서 가치판단의 기준을 세울 수 있다. 생명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존중하여 과연 인류가 과거에 행해온 인간의 일시적 유흥과 만족을 위해 동물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지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해야 한다. 반려동물의 삶이 인간에게 종속되고 관계가 형성된다면 올바르게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몫이다.
썰매개를 소재로 다루는 <에이트 빌로우>와 <늑대개 (아이런 윌)> 영화는 썰매개를 단지 인간의 우월성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 묘사하지 않는다. 인간도 자연 앞에 철저히 연약한 존재이며 개가 인간에 충성을 다하고 희생하는 만큼 인간도 그 생명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함을 공통적으로 강조한다.
동물 보호를 위해 우리가 당장 피켓을 들고 거리에 나가지 않는다 해도, 당장 채식주의자나 비건이 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한번 더 생각할 필요가 있다. 동물 보호 운동의 모든 사안과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향한 우리의 눈과 이성을 완전히 감아버려서는 안된다. 동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동일한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무언가를 당장 바꾸는 것이 버거운 사람들이 많이 있다. 나 또한 그러하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치킨을 아무리 좋아하고 삼겹살이 맛있어도 동물에 대해 한번 더 관심을 가지고, 그에 대한 인식을 하찮음에서 중요한 것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수 있다.
발달된 산업과 기계문명 내에서 어떻게 동물과 조화롭고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할 중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