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혜택을 공유하는 동물
이솝우화 <시골쥐와 도시쥐>는 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세련되게 사는 도시쥐와 촌스럽게 사는 시골쥐를 대비해서 보여준다. '서울'을 경험한 시골쥐는 복잡하고 위험한 도시에서 스트레스받으며 사는 것보다 시골에서 맘 편히 사는 삶을 선택한다.
수의대를 갓 입학한 신입생 시절, 과동기들 사이에 온라인으로 벌어졌던 설전이 기억난다. 실험동물 사용의 당위성에 관한 주제였는데, 결국은 소수의 희생으로 다수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동물 실험은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뻔한 결론으로 끝이 났다. 그것은 공리주의와 인간 우월주의의 조합에서 나온 합리적인 설명이었고 지금도 그 연장선 상에서 동물 실험이 정당화된다. 지금이야 사회적 관심의 증가와 함께 실험동물의 불필요함과 비효율성에 대한 주장이 비교적 많이 대중화되었지만, 오래전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수의대 예과 1학년 학생들에게 깊은 윤리, 철학, 과학적 성찰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그것은 그저 온라인 상에서의 '수다'일뿐이었다. 더욱이 익명 게시판이었기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지 않은 학생들이 훨씬 많았고, 일부 강한 의견을 개진하는 학생의 주도로 논의되었다.
어쨌거나 당시 '생명 평등 주의'를 갖고 있던 나는 그러한 결론이 맘에 들지 않았다. 사람의 생명은 한 사람이라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인정하면서, 왜 동물은 단일 개체로서의 생명이 인정되지 않는 걸까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생명의 무게에 어떤 차등을 두어야 할까에 대한 의문이었다. 인간의 생명을 동물의 생명보다 가치 있게 여기는 인류의 입장에서 보면, 실험동물 연구를 통해 의학이 발전하고 인류의 건강과 복지를 증대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도 실험동물이 사용되는 주된 이유이다.
이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동종 (同種)의 동물을 위한 희생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개의 경우는 사람의 사용 목적에 따라, 식용견, 반려견의 구분과 더불어 실험견도 존재한다. 실험견의 삶이란, 인간의 친구와 가족으로 운명이 선택되지 않고 실험동물 번식 회사에서 길러지고 실험을 당한 후 희생되는 것이다. 연구로 인해 수의학이 발전한다면, 그들의 죽음과 희생은 개의 질병 병인을 밝히고 반려견의 평균 수명을 연장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다. 애완견 및 반려견의 건강과 그 가족인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희생되는 것이다. 일명 '금수저' 개에게 그들이 희생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의문이 편협해 보이고 일말의 가치도 없어 보일지라도, 개를 희생해서 개를 치료한다는 논리는 무언가 부자연스럽다.
실험견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얻은 데이터로 돈 많은 (또는 기꺼이 병원비를 지불할 수 있는) 주인의 사랑을 받는 반려견의 건강과 복지가 증진된다면, 생명의 무게에 대한 차등은 결국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좌우되는 게 아닌가. 수의학의 혜택을 받는 반려견보다는, 식용견으로 쓰였던 개들과 더 가까이 지내고 그들을 떠나보냈던 나로선 쉬이 이해되지 않는 주장이었다.
연구를 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실험동물을 다루기도 하면서 생각할 때마다 이 고민은 여전히 따라다닌다. 그들의 생명은 누구를 위한 희생인가. 생명의 무게에 상대적 차이를 부여한다면, 희생으로 얻어진 과학의 혜택을 받은 자 또한 언젠가는 누군가를 위해 희생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든다.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는 한, 규제는 더 많아질지언정 동물 실험이 사라지리라고 예상되진 않지만, 연구로 사용되는 셀 수 없는 동물이 있다는 것은 눈감을 수 없는 불편한 사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in vivo 데이터를 포함한 연구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동물 실험을 연구 계획서에 포함하지 않으면 심사 자체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골쥐는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위해 시골로 내려갔지만, 개에게 한국의 시골은 위험한 동네이다. 개의 입장에선, 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주인과 보호자 그늘 아래에 살아야 의료혜택과 복지를 유지할 수 있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건물 안에 12시간을 홀로 있다 해도, 미세먼지와 시끄러운 소음, 쾌쾌한 냄새가 불쾌하긴 해도, 시골에서 짧은 줄에 매여 짧은 평생을 지내다 식탁에 오르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