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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개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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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잇독 Jul 29. 2018

# 개를 먹는 것은 나에 대한 폭력이었다

사적 영역에서 시작됐던 반려견/식용견 논쟁

‘반려견을 먹는다’란 문장은 읽는 자체로 불편을 야기한다. 목적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표현도 부적절하다. 내 글에선 기본적으로 개를 목적에 따라 구분하지 않으려 시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려견으로 구체화하기보단 ‘개’를 먹는다라고 표현했다.


‘반려견 vs 식용견’이란 진부한 논쟁은 26년 전 내 삶에 지극히 개인적 영역에서 시작됐다. 개를 먹는 것을 보는 것은 항상 불편했다. ‘프로 불편러’였을까. 누가 내게 가르쳐 줬을까. 그 상황이 싫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있었는데, 대부분은 피할 수 없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 키우던 ‘반려견’이 하루아침에 ‘식용견’이 되어 식탁에 오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양한 경로로 개식용 문화를 경험했다. 그 현장 가운데서 느끼는 나의 주된 감정은 개에 대한 불쌍함이 주였다. 내가 받는 고통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개를 먹는 것은 나에 대한 폭력이기도 했다. 이렇게만 말하면, 동물 복지의 측면에서도 비난받을 여지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결국은 인간인 나의 감정과 내가 받는 정신적 피해가 중요했던 것 아니냐 라는 비난과 함께 말이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고 아니었길 바란다. 어린아이의 순수함은 그 동물의 생명과 행복만을 향했다고 믿고 싶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찬찬히 생각해보니 개식용으로 인한 나에 대한 폭력은 고려되지 않았었다. 


개를 먹는 것은 개뿐만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고통을 주는 행위였다. 물론 이것이 개식용 반대의 논리에 사용될 때는 치열한 논쟁이 야기된다. 개식용 찬성 입장에서는, ‘개식용 반대론자들이 비난하는 행위 때문에 우리도 자유가 침해되며 정신적 고통과 폭력을 당하고 있다’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합당한 주장이며 이해할 만하다. 공리주의적 입장에서는 분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를 먹는 것은 개와 사람 두 종 (species) 모두에게 가하는 폭력이라는 것에 대해 고민해 볼 여지가 있다. 두 종류의 종에게 가하는 폭력이 한 종에게 가하는 폭력보다 더 악한 것인가 라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할 수도 있겠지만, 다양한 종이 자연환경을 공유하고 생태계를 이루며 살아가는  현실을 인정하는 측면에서 숙고해 볼 가치가 있다.


단순히 개인적 차원에서 개를 먹는 것은 어린아이 대한 폭력이었다. 저항할 수 없는 폭력이었고 그것에 대해 눈을 감거나 개에게 정을 주지 않는 것만이 아이의 선택지였다. 그리고 개를 먹지 않는 것만이 한 개인에 대한 폭력에 저항하는 작지만 유일한 행위였다.


한국사회에서 개고기 먹는 문화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과거에 비하면 현저한 변화이다. 하지만 개식용을 반대하는 사람들 중 시골에 살거나 그 환경을 아는 사람들은 여전히 개의 복지가 형편없다고 말한다. 도시는 많이 변화했을지 몰라도, 2018년에도 '시골 개'의 현실을 보면 시골은 30년의 시간이 비껴간 듯하다. 변화의 물결이 미치지 않은 곳이다.


현재는 그러한 폭력이 사라진 세상에서 살고 있다. 최소한 내 생활 반경 내에서는 말이다. 나만 홀로 행복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다. 한편으론 개와 동물의 복지를 위해 삶을 바치며 애쓰는 분들께 마음에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한국 사회가 그나마 이렇게 변한 것도 많은 분들의 애정과 열정 덕분이다. 한국에서 특히 시골에서 개가 학대받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 분들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원치 않는 폭력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분들께 말이다. 물론 누구보다 고통받는 것은 그 열악한 환경 가운데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Canis Familiaris 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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