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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잇독 Aug 12. 2018

채식주의자로 살 수 있을까

아몬드 두유를 마시며

원래 뭐든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이다. 인간은 청개구리 같아서 특정 욕구가 강제로 제한되면 그것에 대한 갈구와 욕망이 더욱 커진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공부에만 집중해야 될 때, 티비 프로그램, 영화, 게임, 만화책, 운동, 친구와의 수다 등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지. 시험이 끝나면 마음껏 이 모든 걸 다하리라 생각하며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억압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막상 시험을 마치고 나면, 그런 것들에 대한 흥미도 재미도 잃어버리고 그저 만사가 귀찮아서 아무것도 안 하게 된다.


우리의 가장 큰 욕구 중 하나인 식욕. 오늘부터 앞으로 한 달 동안 또는 1년 동안 피자를 먹으면 안 된다고 결정하게 되면, 그때부터 눈에 보이는 것은 온갖 종류의 피자이다. 평소에 피자를 즐겨 먹지 않아서, 기억해 보면 한 달에서 수개월 동안 피자를 안 먹었다 할지라도, 지금부터 먹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피자만 더 생각나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동물을 사랑하고 동물권에 관심을 갖게 되면 자연스레 맞닥들이는 것이 채식주의에 대한 문제이다. 물론 동물과 상관없이 건강을 위해 채식을 하는 사람도 있다. 동물권을 위해 인간인 자신의 권리 포기로 채식을 결정하는 사람도 많다. 사실 권리 포기라는 말도, 육식이 인간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 표현이다. 동물을 사랑하고 공장식 사육엔 반대하지만, 내 인생에 고기는 절대 포기할 수 없어서 채식주의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공공연히 선언하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고기 없이 못 사는 사람도 아니라고 스스로의 식습관을 평가한다. 그저 육식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사회의 통념과 대한민국의 식습관 문화에 따라 성장해왔을 뿐이다 (개고기 문화를 제외하고).


한국은 다양한 음식재료와 오랜 전통과 요리법이 있어 음식이 굉장히 다채로운 나라이다. 그에 반해, 미국이란 세계 최강국에 대해 안쓰럽게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제대로 된 미국 고유의 음식이 없다는 것이다. 이민자들이 정복한 겨우 200년 남짓한 역사에서, 그것도 철저히 자본주의로 채워온 국가가 그 땅에 나는 고유의 재료를 가지고 삶의 모습과 방식이 묻어나는 ‘음식다운’ 음식을 만들 여유가 있었을 리 만무하다. 결국 남은 건 자본주의의로 결과로 양산된 맥도널드 햄버거와 콜라, 달걀, 치즈, 우유 등 낙농 제품뿐이다. 그 외에는 외국에서 수입해서 자기네 것 인양 행세하고 있는 프랜차이즈 피자와 스파게티 등이 있겠다.

미국인들한테 너네 음식이 뭐냐 물으면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짧은 역사 때문에 역사를 만들어가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국가에 자랑할만한 고유의 음식문화가 없다는 건 부끄러운 약점이다.

아이언맨의 소울 푸드 치즈버거

그런 비물질적 가치부여에 대한 논의를 마치면, 자본의 힘으로 인해 다른 국가에서 오랜 전통과 역사를 통해 만들어낸 음식들을 일상생활 중에 충분히 누릴 수 있다.


미국에 와서 아몬드 두유라는 것을 처음 먹어보았다. 미국식 낙농업 마케팅에 무비판적으로 영향을 받은 대한민국에서 8-90년대 유년기를 보낸 탓에 완전식품이라고 속아 우유를 꽤나 많이 먹었다. 베지밀의 영향으로 두유 (물론 베지밀 B)도 좋아하긴 했다. 아몬드 두유는 한국에서 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관심 밖이었다. 미국에 와서도 그저 건강하고 맛없어 보이는 비싼 웰빙 제품일 뿐이었다.


우유가 들어간 라테는 좋아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유를 그냥 마시는 게 왠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특별한 계기는 없는데, 우유 특유의 향이 싫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마 우유의 지방과 단백질 때문에 그럴 텐데, 저지방 우유를 먹어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호기심에 건강도 생각할 겸 두유 종류를 먹어 봤는데, 처음에는 너무 맛이 없었다. 베지밀 A와 같은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맛. 의도적으로 먹으려는 노력을 한 건 아닌데, 그렇게 한 번 두 번 먹다 보니 익숙해졌나 보다. 이제는 나름 맛이 괜찮다.


위에 언급한 듯이 한국 음식은 채식주의자용이라고 표기되지 않아도, 쌀과 곡식을 주식으로 하여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맛있는 음식들이 많이 있다. 고기 고명과 달걀을 뺀 나물비빔밥은 꿀도 먹지 않는 완전한 비건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고, 김치 (젓갈 빼고), 장아찌 및 다양한 야채와 채소로 만들어진 밑반찬들이 있다.


그런데도 막상 완전 채식을 하려고 하면, 덩어리 고기가 보이지 않아도 많은 음식에 동물성 재료가 들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입맛의 기호와 식습관을 바꿔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또한 스스로를 채식주의자로 정의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및 사회생활에서의 제약과 불편함을 야기할 수 있다. 직장인일 경우, 회식자리는 대부분 고깃집일 텐데 상사에게 '전 고기 안 먹습니다'라고 커밍아웃을 할 용기가 필요하다. 전체주의적 집단 문화가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한 직장인에겐 채식주의자 선언은 독립투사의 결의와 같다. 한국사회에서 ‘유난’은 금기사항이다.


미국은 어느 식당을 가든 채식주의자 메뉴가 있고, 없는 경우 요청할 수 있다. 다른 집에 초대를 받거나 파티를 해도 채식 메뉴를 요청하는 게 부끄럽거나 해가 되는 일이 아니며, 모임의 주최 측에서 알아서 먼저 채식 메뉴를 반드시 고려한다. 동물권 주장 여부를 떠나, 무슨 이유에서건 개인의 선택이 존중받는 한국사회가 되면 좋겠다. 모난 돌이 정 맞는 시대는 이제 좀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요즘은 한국에도 비건 식당들이 많이 증가한 것을 볼 수 있다. 찾아가는 수고만 조금 들인다면 기호에 맞는 음식들을 충분히 선택할 수 있기에 나 혼자 먹는 문제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다. 그보다 까다로운 것은 '사회생활'의 굴레인 것이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고 고기는 맛있다. 미국에 살면서 한국에서 평생 먹은 소고기보다 훨씬 많은 양의 꽃등심을 먹었다. 가격도 싸고 맛도 있다. 돼지고기는 대체 이 돼지를 어떻게 키웠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싸고, 냄새도 없고, 질기지도 않고 맛있다. 단연 육식의 나라 미국이다.


가끔은 이런 육식의 범람이 무섭다. 소의 근육과 신경, 혈관으로 이루어진 시뻘겋고 큼지막한 덩어리를 그릴에 턱 하니 올려놓고, 혈액과 장액이 줄줄 새어 나오는 고기 한 조각을 입안 가득 채워 넣고 씹으며 육즙이 살아 있어 부드럽다고 표현하는 모습에 종종 섬뜩함과 인간의 내재된 폭력성을 느낀다.


고기를 맛있게 먹으려면 이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예쁘게 포장되어 꽃등심이라 라벨 된 용기를 살아있는 생명체와 연결시키는 상상을 굳이 아름다운 식탁의 나눔 가운데서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소극적인 pseudo-채식주의자 정도는 당분간 가능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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