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엄마 생각

by 물소리를 꿈꾸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엄마 걱정



내 기억 속에 자리한, 내 글쓰기 첫 문장은 이렇다.


“엄마는 강변에 빨래하러 갔다. 나는 배가 아프다.”


1986년 여름이었다. 그때 나는 윗방 문 앞에 배를 깔고 누워서 일기를 썼다. 그런데 왜 하필 그곳에 엎드려서 일기를 썼을까?


어렸을 때 살던 집은 할아버지가 지은 40여 년 된 한옥이었다. 앞뒷문을 열어놔서 환하던 안방과 달리, 늘 어두침침했던 윗방은 평소라면 잘 가지 않던 곳이었다. 그 이유는 윗방 뒤편에 자리한 골방 때문이었는데, 그곳엔 할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왔다는 자개장이 있었다. 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땐 윤이 반짝반짝 났다는 이층짜리 자개장. 하지만 아빠 나이 여덟 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골방에 30년 가까이 방치돼 있었다. 게다가 오래된 물건들이 놓인 비좁고 어두운 골방은 내겐 무섭고 두려운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때 나는 가는 것조차 꺼리던 윗방에 엎드려 일기를 썼다. 그리고 위 문장을 쓰고 고개를 들고 마당을 내다봤다. 내가 있는 어둡고 습한 윗방과 달리 바삭바삭한 햇빛이 쏟아지던 마당. 그곳을 바라보다가 괜히 이유 없이 코끝이 맵게 느껴졌다.


엄마가 지금 내 옆에 없다!

엄마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지금 내 옆에 없다!!


그 이유로 코끝이 찡해졌고, 배도 아팠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울었을까?


그리고 2018년 9월.

그때 나는 엄마가 진짜 내 곁을 떠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또 했다.


두 달 전, 7월이었다.

엄마는 내게 이제 고관절 수술을 해야겠다고 말씀하셨다. 동생이 결혼한 해부터 다리가 아프다던 엄마는 논산에 있는 정형외과에 가도,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아도, 재활병원에 가서 도수치료를 받아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듬해 서울 정형외과에서 MRI를 촬영하겠다고 하자, 원장은 “굳이 할 필요가 없다”라며 만류했다. 통증은 다리 혈관에 염증이 생긴 거라 주사만 맞으면 괜찮을 거라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하고 싶다는 말에 마지못해 승낙했고, 3시간 후 MRI 판독을 하던 원장은 깜짝 놀라 말했다. 고관절 무혈성 괴사라고. 왼쪽은 1기, 오른쪽은 4기라고. 그동안 통증을 어떻게 참았냐는 질문에 엄마는 무통으로 와서 몰랐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엄마는 “애 낳을 때보다 더 아프다”는 체외충격파 치료를 받게 됐다. 충격파 치료를 받길 6년째. 재수술의 위험 때문에 인공관절 수술을 일흔 넘어서 하겠다던 엄마는 예순넷이 되던 2018년 7월, 드디어 수술을 결심했다.


감정에 휩쓸리며 즉흥적인 나와 달리 엄마는 한번 내린 결정에 번복이 없다. 그런 엄마가 내린 결정이라면 오랫동안 심사숙고했으리라. 그날 나는 밤새 고관절 수술에 저명하다던 병원과 담당 교수 리스트를 작성했고, 엄마는 삼성서울병원 P교수를 선택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몇 년 전에 엄마가 고관절 수술을 했다는 동창 미경이에게 전화했다. 몇 년 전에 친구는 엄마 수술이 아주 잘 됐다면서, 한쪽 다리만 한 게 후회가 된다며, 나머지 다리도 마저 할 걸 그랬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미경이는 수술 담당의 이름을 알려주길 꺼렸다. 그리고 마지못해 말했다. “주희야. 결심 잘해야 해. 이 수술 잘못하면 돌아가실 수도 있어.”


미경이가 한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수술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8월 첫 진료가 있던 날, 엄마가 일부러 금식하고 간 덕분에 수술 전 검사까지 미리 하게 됐고, 수술 날짜도 40일 후에 잡혔다. 누군가 추석 연휴 때문에 포기했다고 했다. 게다가 담당 교수는 양쪽 다리를 동시에 수술하겠다고 말했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병원을 나오는 길에 엄마는 다행이라며 활짝 웃었다. 양쪽 다리를 따로 하게 되면 두 번째 수술이 걱정돼서 첫 번째 다리 회복이 더디다는 걸 봤다면서. 엄마 말이 맞으니까.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나도 웃었다. “엄마 말 듣고 보니까 정말 그러네요. 엄마 정말 다행이에요”


그 후 한 달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나는 교육원에 제출할 네 번째 작품을 써야 했고, 엄마는 몇 년 동안 미뤄오던 도배를 했다. 그사이 안 입는 옷, 안 쓰던 물건들은 모두 버리고, 거실에 있던 책장 세 칸 중에 두 칸은 작은 방으로, 나머지 한 칸에 있던 내 책들은 끈으로 묶은 뒤에 컴퓨터 방으로 옮겼다. “니가 산 책들은 다 니 집으로 가져가. 니 아빠 욕심에 책 안 줘” 그때는 엄마가 무슨 생각으로 내 책들을 챙기라고 했는지, 잘 몰랐다. “나중에 집에 와서 보지 뭐”라고 말하는 내 말에 엄마는 아니라고. 책은 필요한 사람이 봐야 한다고 거듭 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엄마는 혹시 모를 죽음에 대비한 거라고 했다. “니가 남자라도 인사시키러 오면 집이라도 깨끗해야지.” 어쩌면 본인은 못 올 집일지언정, 남은 가족을 위해 손때 묻은 살림을 정리하고 서둘러 도배를 했던 엄마의 깊은 뜻을 그땐, 미처 몰랐다.


그리고 수술 전날이 됐다. 그동안 일주일 넘게 진통제를 끊은 엄마는 통증 때문에 무척 힘들어했다. 겨우 5cm 높이인 자동신장 체중계에도 올라가지 못해서 구두로 작성해야 했고, 몸무게도 8kg 가까이 줄었다. 엄마와 함께 수술을 받는 환자는 아저씨 두 분이었는데, 그분들은 다 한쪽 다리만 수술을 받는다고 했다. 한 아저씨는 수술 후에 술을 마실 수 있냐고 주치의에게 물었고, 그 말에 와이프 되는 아주머니가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다”고 눈을 흘겼다. 고관절 괴사는 술을 많이 마시는 50대 남성에게 주로 발병한다. 그런데 우리 엄마한테는 왜 온 걸까? 엄마는 술도 많이 마시지 않았고, 남자도 아닌데. 아마도 20여 년 전에 일하다가 쓰러진 엄마를 늦게 발견했을 때 혈관이 막혔던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빚 때문에, 우리 남매 등록금 때문에 밤낮없이 일해야 했던 엄마. 그렇다. 엄마 목숨을 담보로 우리 남매가 이만큼 자란 거겠지. 알에서 깨어나면 어미 살을 파먹는다는 새끼 우렁이. 동생과 나는 새끼 우렁이 두 마리였다.


다음 날. 아침 7시까지 오라고 했는데, 동생이 새벽에 병원에 왔다. 전날 밤늦게 논산에서 올라온 동생은 병원 근처 찜질방에서 잠을 잤는데, 안 그래도 작은 두 눈이 더 퉁퉁 부어있다. 휴대폰을 잃어버릴까 봐 가슴에 품고 잤다며 너스레를 떠는 동생. 하지만 엄마와 나는 안다. 잤다는 건 거짓말이고, 밤새워 뒤척이다가 곧바로 병원에 왔다는 걸. 2인실 여자 병실이어서 잘 공간 없다고 찜질방으로 보냈는데, 동생도 걱정이 많이 됐겠지.


그렇게 이동원 분의 도움을 받아 수술실로 향하는 엄마와 우리 남매. 이미 수술실 앞엔 첫 수술을 앞둔 환자들이 휠체어를 타고 대기 중이다. 머리에 캡을 쓰고 휠체어에 앉은 엄마가 들어갈 때 동생은 “엄마 잘하고 와요”했고, 나는 “엄마 이따 봐”라고 말했다. 일부러 밝게 말하는 우리를 보고 엄마도 웃어 보이곤 수술실로 들어갔고, 나와 동생은 수술실 옆에 있는 보호자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에 들어서자 눈물부터 났다.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보호자가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 그때 정말 절실하게 기도했다. 이제 착한 딸 되겠다고. 그리고 엄마 말 안 듣고, 엄마한테 대들고, 엄마한테 잘못한 생각만 나서 계속 울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보호자 대기실 천장에 있는 레일. 그곳으로 옮겨지던 수술용품들. 수술 중에 여러 번 “00환자 보호자 분”을 부르던 선생님들. 다행히 엄마 이름은 불리지 않았지만, 6시간 동안 눈물은 계속 쏟아졌고, 가슴은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먹먹했다. 아마 그때 동생이 옆에 없었더라면, 엄마 말씀처럼 혼자 못 이기고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렸을 땐 그렇게도 찡찡거리더니 마흔이 돼서는 노처녀 히스테리를 부리는 딸과

글 쓴다고 뜬구름 잡는 딸을 유일하게 믿어주는 엄마 얘기를 써 보자.

아마 이 글을 쓰는 걸 엄마가 아는 날엔, 늘 그렇듯 이렇게 말하겠지.


“으이구. 똥 쌀 놈의 새끼”

작가의 이전글진흙이 묻은 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