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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이 묻은 구두

1986년 6월 어느 일요일

by 물소리를 꿈꾸다

사랑방 문을 열어 보았다.


벽을 향해 모로 누운 아빠의 등이 누에고치처럼 둥글게 말려 있었다. 차라리 벽에 등을 기댄 채 꼿꼿이 앉아 있었으면 좋았을걸. 이날 아빠에게도 아무런 힘이 없는 것 같아서, 아빠가 밉기보다는 참 불쌍하다고 생각한 나는 열었던 방문을 닫았다.


그리곤 안방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부터 할아버지는 논물을 보러 나가셨고, 할머니는.. 어디 계셨지? 지금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때 마루 밑에 놓인 엄마 구두가 눈에 띄었다. 구두 뒤축엔 진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마치 결혼과 동시에 지난 8년 동안 엄마가 살아온 삶을 보여주는 것 같다. 늘 일만 벌이고 책임지지 못하는 남편 뒤처리를 하느라 엄마는 늘 가슴 졸이며 살아왔을테니까. 알루미늄 샤시 사업이 망하고 귀향해서 벌인 농약가게에선 한 해는 수해를 이듬해엔 화마 속에서 동생 한 명 건지고 모든 걸 잃어야 했다. 그리고 표고버섯과 딸기하우스 농사도 줄줄이 실패로 이어졌다. 결국 엄마는 일곱 살 난 나와 다섯 살 된 동생을 할아버지에게 맡겨 두고 서울로 간다고 했다. 아빠는? 당연히 엄마와 함께 떠나지 못했다.


그때 난 국민학교 1학년이었다. 여름방학을 한 달 앞둔 6월의 일요일이었고 날씨는 더없이 맑았다.


언젠가 엄마한테 물어봤다.

“그때 내가 다른 아이들처럼 울고불고 매달렸으면 엄마가 떠나지 않았을까요?”

엄마가 답했다.

“아니. 넌 철이 일찍 들어서 그러지 않았을 거야.”


아니, 엄마는 잘 몰랐다. 나도 그땐 엄마를 잡고 싶었다. 가지 말라고. 여기서 같이 살자고. 나랑 호균이 두고 가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그 말을 할 수 없었고,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뜨거워진 목울대를 참고 견디며 엄마 구두를 닦았다. 남겨질 나와 동생보다는 가족 누구의 배웅도 받지 못한 채 떠나야 하는 엄마가 더 불쌍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엄마 구두 뒤축을 걸레로 깨끗이 닦아두고, 이번엔 동생을 찾았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있었던 동생을 데리고 도로를 건너 국민학교 옆에서 탁원 아저씨가 하는 가게에 갔다. 시골에 있는 가게가 그렇듯 간판 없이 가정집 한쪽에 유리문을 달아 운영하는 작은 가게였다. 그곳에서 동생에게 과자를 사주고 학교 운동장으로 향했다.


일요일이어서 운동장엔 아무도 없었다. 한동안 동생하고 놀다가 혼자 미끄럼틀 위에 올라가 집 뒤에 있는 도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플라타너스 잎 너머 도로에 서 있는 엄마가 보였다. 순간 “엄마”하고 크게 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엄마”를 부르면 동생이 한달음에 엄마한테 갈 게 뻔하니까. 그러면 엄마가, 엄마가, 더 힘들어질 테니까. 멀리 버스가 먼지를 이끌고 산에서 내려온다. 그와 동시에 운동장을 내려다봤다. 동생은 늘 그렇듯 개구리나 곤충을 잡고 있는지 고개를 숙인 채 뭔가에 열중하고 있다. 다시 급히 도로를 바라본다. 버스가 멈춰서더니 곧바로 출발한다. 엄마가 서 있던 도로는 그때까지 포장이 되지 않아, 버스가 출발해도 먼지는 그대로 머물러 있다. 안개가 걷히듯 뿌연 먼지가 사라지자, 그제야 엄마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그새 버스는 탁원 아저씨 가게를 지나 사거리로 향하고 있다.


엄마가 떠났다.


순간 코끝이 매웠다. 할아버지가 들마루에서 태우는 모깃불처럼 코끝이 매캐해졌다. 하지만 울 수 없었다. 언젠가 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세상 천지에 느이 둘 뿐이다”던. 미끄럼틀에서 내려온 나는 동생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그날 동생이 엄마를 찾았는지, 그래서 여느 때처럼 마당에서 뒹굴면서 울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엄마가 떠난 도로. 그리고 꼬리에 먼지를 매달고 가던 버스만 기억난다.




가지마세요 하고 외쳐보지만 가슴 속 한 하나 넘지 못하고 메아리 되어 오네요 예전 새벽에 짓다만 밥물이 아직도 가슴속에서 떠다니는데 토란잎 차마 눈물방울 삼키지 못하는 게 꼭 내 모습 같아요 뒤에 먼지 길게 따라가던 버스 잊지 못해 동생 손잡고 얼마나 걸어야 했던지 유월 한낮 먼지 뒤집어 쓴 개망초 흰 꽃잎 손으로 흩뿌리며 산아래 강변가에 갔었어요 늘 빨래하던 그 곳에서 섬집아기 부르면 응어리진 핏빛 울음 되어 노을지는데 집 툇마루에선 침묵하는 할아버지의 짧은 곰방대로 숨어들어 연기되어 날아가는 게 가슴이 더욱 답답해서 어지러웠어요 동생은 할머니가 내놓은 미역국이 오줌냄새 난다고 싫어했고 나는 할아버지가 태우는 마른 쑥의 매캐로움에 기침을 했었어요 기침이 아니라 코끝이 시큰거리는 서러움이었는데 할아버진 두껍게 갈라진 손으로 내 이마를 짚어주었지요 이 곳에 와서도 둥둥 거리는 가슴 누르고 울고만 있는데 얼마만큼 일어야 가슴속 쌀뜨물 다 빠져나가나요 이제는 불러도 그냥 가시는군요 언젠가는 떠나갈 것을 내 가슴속 허기만 남겨 놓고 떠나갈테지… 하면서도 가 지 마 세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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