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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콩쥐팥쥐

1987년 3월 말

by 물소리를 꿈꾸다

“서현아 책 사줄까?”

내 말을 듣자마자, 조카의 작은 눈이 활처럼 휜다.


서현이가 선택한 책은 <어린 이산과 천자문의 비밀>. 책 한 권만 보내기 그래서 ‘빙허각 이씨’ 이야기를 다룬 <총명한 이씨 부인은 적고 또 적어> 책도 함께 보냈다. 작년에 한동안 why책에 푹 빠져 있던 서현이는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가 불쌍하다고 했다. 그러더니 몇 달 내리 틈만 나면 사도세자 그림만 그렸다. 그런 조카에게 “사도세자는 마냥 불쌍한 사람이 아니다. 사람도 여럿 죽인 사이코패스였다”라는 말을 해줄 수 없었는데.. 이번엔 정조 임금이 좋아졌다는 말에, 실학자 책으로 뭘 사줄까 하다가 ‘빙허각 이씨’ 관련 책을 골랐다.

일곱 살 서현이가 그린 사도세자


그 순간, 돌아가신 아빠 생각이 났다.


초등학교 2학년 3월 말, 전학을 간 학교에선 한 명당 한 권씩 학급문고를 사가야 했다. 그 말을 들은 아빠는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콩쥐팥쥐>책을 사오셨다. 이미 교실에 진열된 (다른 친구들이 가져온) 책들은 알록달록한 컬러 그림에, 내용도 쉽고 재미있는 동화책이었다. 하지만 내가 가져온 책에 그려진 그림은 흑백인 데다가, 몇 장 읽어야 그림이 한 페이지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글밥이 꽤 많았다. 게다가 학교에 갖고 간 그 책은 친구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책은 전래동화치고는 어른들도 경악할 만한 결말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으로 기억한다. 퀴즈 프로그램을 보는데 콩쥐팥쥐의 결말이 질문으로 나왔다. 흔히 콩쥐와 팥쥐가 화해하고 행복하게 지내는 거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팥쥐는 젓갈로 만들어졌고, 그 젓갈을 먹은 팥쥐 엄마는 미쳐서 죽고 말았다는 게 진짜 결말이었다. 나는 그 답을 여덟 살 때 알았다. 그렇다. 아빠는 여덟 살인 딸에게 책을 사주더라도 마냥 환상을 심어주지 않았다. 전학을 가기 전, TV만화를 보는 내게 “저건 다 거짓말이야”라고 말씀하신 반면, <오성과 한음> 인형극을 보면 극에 나오지 않는 오성과 한음 얘기 해주던 분이 아빠였다.


그리고 엄마와 동생, 내가 살던 서울 집에 올라올 때면 늘 책을 사서 읽던 아빠 모습이 생각난다. 아빠가 다 읽은 후엔 엄마에게 시간 날 때마다 읽어보라고 권했는데, (전두환 욕을 하며 건넨) 그 책들은 바로 삼청교육대 관련 수기집이었다. 어린 내가 읽은 책들은 (친척이 준 전집이나 학교에서 빌려온 책 말고는) 거의 모두 아빠가 사다 준 게 대부분이었다. 아빠는 책을 한 번에 두 권씩 사오셨는데 <이야기 논어>와 함께 <엘리자베스의 멋진 친구>를. <이야기 초한지>와 함께 <장수골 만세> 이런 식으로 다소 어려운 책과 달달하고 흥미로운 책을 동시에 사다 주셨다. 아마도 딸이 책을 편식할 까봐 염려했던 아빠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번에 ‘정조 이산’ 책을 원하는 서현이에게, 어떤 책을 사주면 어울릴까? 하고 고민했는데, 아빠도 나와 같은 책을 고르지 않았을까? 정약용은 잘 알려져 있으니까, why책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아빠도 ‘빙허각 이씨’ 책을 골랐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서현이가 사도세자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으셨다면, 분명 아빠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소론 노론 얘기를 하며, 당장 서현이를 데리고 윤증 고택과 돈암서원을 가셨을 지도 모를 일이다.


처음엔 내가 국어국문학과에 가는 걸 탐탁지 않아 하셨던 아빠. “글 쓰려는 사람을 서울에서 부산까지 줄 세우고도 남는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도 글 쓰는 일에 미련을 못 버리자 “열 코에 한 코는 걸리겠지”라며 내 어깨에 살며시 손 올리던 아빠. 그런 아빠가 딸내미 성공하는 것도 못 보고 돌아가셨다. 아빠, 나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글 쓸게요. 지켜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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