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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이병현 Oct 29. 2022

영화 'EO' 리뷰

제5회 서울동물영화제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줄거리가 그대로 담겨있지만, 이것이 '스포일러'(영화 보는 재미를 망치고 방해함)가 될 법한 종류의 영화는 전혀 아니므로 안심하고 읽으셔도 좋습니다.


영화는 빨간 빛이 점멸하는 혼란스러운 장면으로 시작한다. 한 여성이 쓰러진 당나귀를 부여잡고 울고 있다(당연하지만 이 장면은 영화의 오마쥬 대상인 '당나귀 발티자르' 뿐만 아니라 '토리노의 말'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이윽고 여성은 당나귀에게 심폐소생술을 하듯 입을 맞추고(혹은 숨을 불어넣고), 이내 당나귀가 벌떡 일어서자 여성도 기쁘게 웃으며 따라 일어나 관객에게 인사한다. 알고 보니 관객이 본 장면은 서커스의 일부였던 것이 밝혀지고, 여성은 당나귀 주위를 돌며 춤춘다.

심지어는 불온한 성적 함의조차 느껴지는 애정을 담아 당나귀를 쓰다듬고 피부를 맞대는 이 여성은 곧 서커스 내 동물 출연을 금지시키는 동물보호법으로 인해 당나귀와 강제로 헤어지게 된다. 'EO'의 시놉시스를 대충 본 당신은 아마도 이쯤부터 'EO'라 불리는 이 당나귀가 사랑하는 여인과 다시 만나기 위해 탈출을 감행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삼만리 여정을 펼치는 로드무비를 기대할지도 모르겠다.그렇다면 이 영화는 당신의 그러한 기대를 통렬히 배반할 것이다.

이 시적이며 초현실적인 영화는 그다지 논리적으로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장면과 장면 사이의 공백을 채우려는 시도는 그다지 의미있는 노력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영화를 관통하는 테마는 'EO'라 불리는 한 당나귀에 관한 것인데, 스텝롤에 따르면 네다섯마리의 당나귀가 함께 연기한 이 'EO'는 모든 장면마다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이다. 처음 서커스에서 구출되어 다른 말과 함께 있을 때도 주목받지 못했고, 이후로도 내내 시선에서 약간 빗겨나 파티장에서 벽에 붙어서서 음료만 홀짝이는 '월플라워', 즉 '아싸'마냥 주변을 맴도는 존재다.

그런 'EO'를 눈여겨 보는 것은 대체로 사회에서 약간은 비주류로 여겨지는 사람들, 혹은 반대로 사회에 질서를 세우려는 사람들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구조대원이 신고를 받고 나타나 EO를 붙잡으면 자칭 아나키스트가 등장해 EO를 구해주고, 한 축구팀 훌리건이 그를 영웅시하면 상대팀 훌리건이 EO를 악마로 여겨 두들겨패는 식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스필버그 감독의 '워호스'(혹은 오마쥬 대상인 '당나귀 발티자르')처럼 EO라는 이름을 지닌 이 당나귀를 무감정하게 따라가며, 단지 관객이 제멋대로 그 동물에 감정이입하고 슬퍼하도록 편한 서사를 진행하는 것만은 아니다. EO가 손수 자신의 뒷발을 더럽혀 인간을 죽이는 장면이 중간에 아무런 경고도 없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전후 맥락이 삭제된 채 등장하는 이 갑작스러운 장면에서 EO는 마치 살해당하는 다른 동물을 위해 분노를 발현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는데, 여기서 관객은 그가 순진무구한 동물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때문에 뒤이은 장면(이 영화에 파트가 도입되었다면 아마도 3장이나 4장 정도 될 법한 장면은)이 이 괴상한 영화에서도 가장 탈서사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영화는 기존에 구축한 EO를 둘러싼 관성적 서사, 즉 'EO를 향한 무심한 시선 이탈과 그렇게 동떨어진 EO를 구태여 주목하게 되는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구축하기 위해, 과감하고도 난데없이 트럭운전기사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그린다. 그 다음 영화는 한 신부가 EO를 정체불명의 대저택으로 데려간 뒤(구출인지 도둑질인지 모를 방식으로, EO가 설마 "범법자"는 아닐 거라 믿으며), 자신의 의붓어머니와 근친상간을 맺는 장면을 보여주고, EO가 신묘한 힘을 발휘해 그 대저택의 정문을 열고 뛰쳐나오는 것을 보여준다. 흐르는 댐 위에 선 EO. EO가 이제껏 꾼 꿈처럼, 혹은 이번에야말로 현실인지도 모르겠지만,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고, 마지막 장면에서 EO는 소떼에 섞여 정체불명의 장소로 들어선다.

대저택의 문다시 열릴 때 흐르는 불길한 음악은 EO 역시 불길한 결말을 맞이했음을 암시하는데, 이 영화를 졸지 않고 끝까지 본 관객이라 해도 영화를 보자마자 정직한 감상을 물어보자면 영화에 대해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는 말 밖에는 할 도리가 없으리라 믿는다. 나는 이런 영화에 대해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 아닌 다른 반응을 내비친다면 그것은 순 거짓말이라 믿으며, 오히려 '잘 모르겠으니 함께 살펴보자'는 리뷰야말로 정직한 동시에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시간의 한계상 더 조리있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만, 나 역시 지금으로서는 이 영화가 대체 무슨 영화인지 잘 모르겠다는 말 밖에는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히 곱씹어 생각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라 생각한다. 기회가 된다면, 그리고 도전정신이 충만한 영화 마니아라면,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고 꼭 보길 권유한다.


키워드: #초현실 #예술영화
한 줄 감상평: 한 당나귀의 시적 로드무비
추천하고 싶은 사람과 그 이유: 실험적 영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영화광’에게 추천합니다. 초현실적이고 시적인 영화로서, 장면과 장면 사이에 많은 공백이 존재해 이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가 거의 불가능해, 일반적 관객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합니다.


*본 리뷰는 제5회 서울동물영화제 관객리뷰단 활동을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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