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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이병현 Dec 19. 2022

<가버나움>은 비윤리적인 영화인가?

알고리즘의 힘을 빌려 글을 시작해볼까 한다. 왓챠에 가버나움을 검색하면, 연관 영화로 뜨는 것이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이다. 이는 아마도 <가버나움>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깊은 인상을 받았을 주인공, 아역배우 자인 알 라피아의 연기 때문에 뜨는 결과물일 것이다. 내가 알기로 고레에다와 윤가은, 두 사람의 디렉팅 방식은 상당히 비슷한 편인데, 아역배우가 아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먼저 서로 친구처럼 지내게 만들고, 현장 분위기를 편하게 풀어서 자연스럽게 연기가 흘러나오도록 만드는 식이다. <가버나움>에 대해서는 디렉팅 방식이 어땠는지 잘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대동소이 하지 않았을까 싶다.

때문에 씨네21에 윤가은 감독이 <가버나움>에 대해 썼을 때 나는 당연히 이 점에 대한 언급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실제로 관련된 언급을 짧게 하고 있긴 하지만 감독의 입장이라기보다는 관객의 입장에서 언급한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영화는 또한 이 전염병 같은 절망의 현장을 계속 지켜보고 응원하게 만드는데, 그 힘은 어떤 순간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그런 시늉조차 하지 않는 주인공 자인에게서 나온다. 자인은 또래에 비해 작고 마른 몸과 그 또래로는 절대 보이지 않을 맹렬하고도 피로한 눈빛을 하고서 늘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간다. 동생을 팔아넘긴 가족을 등지고 집을 떠나면서, 갑자기 사라진 보호자의 아이에게 자신이 먹을 것을 나눠주면서, 동생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어른에게 칼을 휘두르고 또 다른 힘겨운 인생이 태어나지 않게 부모를 고소하면서. 그렇게 사랑하고, 분노하고, 자신을 주장하면서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우리는 어린 소년의 끝없는 생명력과 강력한 의지에 압도당하며 이 아수라의 지옥을 뚫고 함께 빠져나오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고민하게 된다. 이 망해가는 세상에서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결과를 짊어지고 사는 이들을 위해, 곧 나의 고통으로 번질 그들의 고통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더불어 잘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2548


재미있게도 자인의 얼굴에 집중하면서도, 이와는 거의 정반대의 의견을 제시한 김지미 평론가의 글이 있어서 또 잠시 인용해본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가장 큰 힘은 신파적 스토리나 네오리얼리즘을 연상케 하는 형식보다 자인의 얼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의 다른 요소를 말하기에 앞서 그의 스타성과 존재를 증명하는 눈빛(김소희)을, 관객을 당황하게 만드는 카리스마(김혜리)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이 글의 쓰게 된 가장 큰 동력 역시 자인의 얼굴이다. 하지만 스타성이나 카리스마에 매료된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연기는 보통 배우들의 명연기가 주는 울림과 차원이 다르다. ...그의 어린 육체에 조로(早老)한 영혼을 깃들게 만든 세계의 구성원으로서 느끼게 되는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가버나움>은 관객의 윤리적 각성을 촉구하지만 이 작품 자체가 윤리적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단 이 영화가 야기하는 일차적 불편함은 형식에서 기인한다.

...<가버나움>의 한계는 자인과 요나스의 고통스러운 여정이 시작된 구조적 모순을 파헤치지 못하고, 섣부른 화해로 모든 것을 개인적인 차원으로 축소해버리는 데 있다. 감독이 연령도 불분명한 자인이 살인죄로 기소된 사건 대신 그의 부모를 고소하는 사건의 변호인(나딘 라바키)으로 등장하기로 했을 때 그 한계는 이미 정해졌다. 자인의 엄마(카우사르 알 하다드)가 ‘나처럼 살아봤어요?’라고 항변할 때 자인의 변호인이자 영화의 연출자인 나딘 라바키가 준비한 것은 침묵뿐이다. 슬픈 눈으로 응시할 뿐이다. 그것이 베이루트의 혼돈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자 태도다. 거기에는 베이루트의 길거리에 떠도는 수많은 자인들과 그들을 ‘벌거벗은 삶’으로 방치한 부모들에 대한 연민이 있을 뿐, 그것을 배태한 세계에 대한 사유가 없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2343


이 두 입장은 영화를 보면 자연스레 나오게 되는 것이고 둘 다 어느 정도는 설득력이 있다. 나를 예로 들자면, 영화를 보고 가장 1차적으로는 윤가은 감독의 글과 같은 감상을 가졌지만, 곱씹어볼수록 김지미 평론가의 의견에 가깝게 흘러간 듯하다. 그렇다고 완전히 동의한다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에 김지미 평론가가 제시하는 문제는 이 작품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기보다는 (즉, 감독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관객성의 문제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이 영화가 처음부터 베이루트를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로 기획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픽션으로 기획된 한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것이 이렇게 재미있는 ‘픽션’으로 기획되어서 영화제에까지 소개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가버나움>이 베이루트의 삶에 대한 사유를 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기 이전에 이미 베이루트에 대한 아무런 사유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어찌됐건 평론가로서 비판은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무엇보다 나는 다시, 이 영화가 전문 성인배우를 쓰는 대신 아역배우를 굳이 기용해서 힘든 길을 간 이유를 되짚어보고 싶다. 영화 첫 장면부터 나오지만 이 영화는 부모를 고소하는 내용이다. 심지어 종반부에 자인은 이를 통해 아이들의 영웅이 되기도 한다. 자인이 칼을 들고 뛰쳐나가는 장면은 울분에 가득 차 있는 동시에 분명히 관객의 감정이입을 요구하도록 찍혔다. 김지미 평론가의 글은 <가버나움>이 부모들에 대한 연민은 있지만 그런 쓰레기들을 배태한 세계에 대한 사유가 없다는 근거로 감독이 검사로 등장한 마지막 장면을 예로 들고 있지만, 이것은 이 영화가 거의 완전하게 ‘아이의 편’에서 편파적으로 찍힌 작품이라는 사실을 무시할 때만 가능한 평이다. 김지미 평론가는 “자인의 부모는 어린 나이에 임신해 과다출혈로 병원에 실려간 딸 사히르(하이타 아이잠)를 잃고, 아들 자인에게 방송과 법정에서 모욕당한다”는 문장을 썼는데, 이야말로 영화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틀린 표현이라고 본다. 오히려 그런 편파적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조혼 풍습’ 등 열악하기 짝이 없는 베이루트의 여성인권 실태와 관련해, 어머니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내는 것이 바로 이 영화가 세계에 대한 사유를 놓치지 않았다는 근거가 아닐까?


<이터널스>에 출연한 자인 알 라피아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만들어낸 ‘구조’, 그를 배태해낸 세계에 대한 ‘사유’를 펼쳤다는 이유로 많은 공격을 받았다. 한국에서 그의 ‘악의 평범성’ 이론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종종 많은 오독을 일으키지만, 나는 그가 철저하게 아이히만을 사형시켜야만 한다고 얘기했던 것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사회구조를 생각하는 것과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구조의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자인과 그 동생에게 명백한 가해를 저지른 부모를 "방송과 법정에서 모욕"하는 것은, 구조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이므로 비윤리적인 행위라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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