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주 씨네토크
영국 북동부의 한 폐광촌, 정부가 이곳에 시리아 난민을 보낸다. '판잣집에 살며 하루에 감자칩 하나로 연명하는 삶을 사는' 폐광촌 주민들은 분노하고, 시리아 난민은 뜻하지 않은 적대에 힘겨워한다. 마을에서 '올드 오크'란 이름의 오래된 펍을 운영하는 주인공 'TJ'는 시리아 학생 '야라'와 우정을 쌓으며 주민과 난민이 하나의 커뮤니티로 화합하는 과정을 돕는다.
켄 로치 작품답게 담백한 형식이다. 나는 원래 켄 로치 영화를 처음 볼 땐 그다지 메모도 많이 하지 않고, 스토리에 집중해서 보는 편이다. 이번엔 올드 오크의 뒷방이 열리는 순간부터 눈물이 차올랐다. 사진 속에서 힘겨운 상황이지만 자부심을 갖고 활짝 웃고 있는 파업 광부의 얼굴이 영화 속 쇠락한 마을과 대비되며 발생하는 잔인한 대비 효과 덕분이었다. 마침 영화의 도입부가 스틸 사진의 나열이었는데, 영화가 자체적으로 유사 푼크툼 효과를 자아냈다고나 할까? 이미 흘러간 것에 대한 아련한 상실감을, 그게 내가 상실한 것이 아닌데도 마치 나에게 내밀한 상실인 것마냥 체험 하게 해준다는 점에 영화 매체의 위력이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가 끝난 후 변영주 감독의 씨네토크가 있었다.
씨네토크가 있는 줄 모르고 현장에서 티켓을 샀는데, 거의 매진된 자리를 보며 '그래도 켄 로치 은퇴작이라고 많이들 보는구나', 하고 감동했던 나 자신이 약간 부끄러웠다.
변영주 개인 팬으로 보이는 분이 '나는 평소에 상업영화만 봐서 그런지 약간 코 끝이 찡하긴 했지만 감독님이 펑펑 우셨다는 부분이 어딘지는 모르겠더라' 라는 질문을 하셨는데, 이런 걸 보면 역시 팬덤의 힘이 중요하긴 하다. 변영주 감독 덕분에 관객 수 하나 추가된 셈이니.
토크 중 나온 주요 쟁점 하나는 이 영화가 "노동 조합의 역사와 전통 부분을 빼면 한국에도 적용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사실 '노조의 역사와 전통'이 떼려야 뗄 수 없이 아주 핵심적이다. 주민과 난민이 화해하는 결정적 계기가 '연대 용기 저항' 깃발을 공개하는 순간이기도 하고, 영화의 결말도 이 깃발이 장식하기 때문이다.
즉 켄 로치 감독은 난민 이슈를 다루는 동시에 노동 계급이 이에 대응하는 방식(적대, 혐오 등)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을 것이고, 이를 노동 계급의 전통(연대, 용기, 저항)에 호소함으로써 우회적으로 답변한 셈이다. 단순히 뒷방에서 같이 밥을 먹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고, 이들이 이 행위를 '노동자가 힘을 합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할머니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잊힌 전통에 기반해 새로운 희망을 모색하려는 게 켄 로치가 힘겹게 내놓은 대답인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 영화를 한국에서 번안한다고 할 때, 우리가 호소할 수 있는 '전통'은 대체 무엇일까? <나의 올드 오크>에서 "연대, 용기, 저항"이란 단어를 보자 즉각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한 주먹을 불끈 쥐고 올린 노인을 보며 느껴지는 어떤 감동을, 한국에서도 바랄 수 있을까? (<1987>에서 연희 같은 방관자적 시민마저 함께 외치던 "호헌철폐! 독재 타도!"란 외침이 이를 대체할 수 있을까? <1987>을 <명성, 그 6일의 기록>과 함께 연속 상영해보자)
나는 한국엔 딱히 비빌 언덕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린 아직 전통을 만들어가는 와중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반대로, 아직 전통이 형성되지 않은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희망일 수도 있겠다. 한용운이라면 "좋은 일의 자료가 되는 역경에 싸여 있는 조선 청년은 득의의 행운아"라고 강변했을 테니.
문이 열리며 꽃을 든 사람들이 모습을 보이는 장면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듯하다. 장례식이야말로 (그 형태가 어떠한 방식이든) 영상 매체에서 가장 직관적으로 인류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닐 수 있는 의식이 아닐까? 존 포드의 <태양은 밝게 빛난다>나 장예모의 <집으로 가는 길>을 내가 오래도록 기억하는 이유도 두 영화 속 장례식 장면 때문이니…….
- 1/16 광화문 씨네큐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