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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이병현 Feb 12. 2024


<추락의 해부>는 뭘 하고 싶은가?

미스터리가 필요해

프랑스 알프스의 외딴 산장에서 한 교수가 의문사한다. 부검 결과 살인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되고, 산장에 있던 유일한 인물인 아내 '산드라'가 용의자로 지목된다. 시각장애인 아들이 주요 증인인 상황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남편을 죽이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남편이 자살했다고 주장해야만 한다.


플롯만 보면 주인공이 남편을 죽였는지, 죽이지 않았는지를 두고 다투는 법정물로 보이지만, <추락의 해부>는 일반적인 법정물이 아니다. 영화의 초점은 진실게임과는 거리가 멀다. 법정물의 클리셰, 혹은 기본 전제는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배심원단을 '설득'하는 점에 있어서, 검사의 스토리와 변호사의 스토리 중 어느 쪽이 더 개연성 있게 여겨지는가가 중요하지,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대부분 법정물이 깔고 있는 시니컬한 자세이다. 법정에서 가려지는 것은 '진실'보다는 '가장 개연성 있는 스토리'일 뿐이라는 태도다.


<추락의 해부>는 주인공을 작가로 설정시켜, 이런 일반적인 장르 클리셰를 대사로 직접 언급한다("법정에서 다뤄지는 것은 삶의 진실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왜?'가 더 중요하다" 등등). 장르('물의 탈을 뒤집어쓴')영화가 장르의 기본 전제를 대사로 노출시키는 이유는 보통 '나는 이것보다 한 발 더 나아갈 거야'라는 선언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는 구성상 주인공이 남편을 죽여야 하는 이유, 즉 살인동기와 관련해서는 거의 아무런 힌트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러닝타임 대부분이 남편의 자살동기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관객은 아들인 다니엘과 마찬가지로 살인보다는 자살 쪽에 더 무게를 둘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추리물로서는 퍽 시시하다.


영화는 심지어 주인공을 둘러싼 사회의 반응이나 마녀사냥 등에 대해서도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 중간에 잠깐 TV토론 장면이 나오기는 하지만, 문학평론가가 주인공의 소설을 논하며 "교수의 자살보다는 아내의 살인이 더 흥미롭지 않느냐"면서 낄낄거리는 정도의 내용으로 딱히 워킹맘에 대한 편견, 외도한 여성에 대한 비난 등 으레 다룰 법한 장치가 아니다. 즉 <더 헌트>처럼 '억울한 희생양'에 대해 다루고 싶었던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주인공은 이례적으로 보석 석방되는 등, 딱히 불합리한 사법체계나 편견어린 시선에 일방적으로 난도질당하는 장면을 강조해서 보여주지 않는다. 즉 이 영화는 사회비판물이 되고자 하는 의도가 없다.


그렇다면 <추락의 해부>는 무엇을 시도하고 있는가? 작품에서 강조되는 건 오히려 한 가족이 처한 비극이다. 오프닝 장면부터 일관적으로 영화는 시각장애인 아들의 심리 상태를 관객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애써서 연출한다. 냉온수 수도꼭지에 하나씩 초점을 맞추며 손을 클로즈업 하는가 하면, 변호사와 검사가 논쟁하는 장면에서 소리를 따라 고개 돌리는 다니엘 얼굴만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디테일 덕분에 주인공보다도 아들인 다니엘이 더 주인공인 것처럼 보이는 순간도 있다.


이처럼 다니엘의 시각장애를 공들여 연출한 이유는 영화에서 근본적인 살해/자살 동기, 그리고 부부 갈등의 연원이 다니엘이 4살 때 당한 사고이기 때문이다. 이 사고로 인해 다니엘은 시각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다. 아마도 이로 인해 사무엘과 산드라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변형되고 만다. 영화는 2시간 30분에 걸쳐 이 부부가 처한 복잡미묘한 심리상태를 아들이 직면하게 되는 비극을 천천히 그려나간다. 과연 그 의도에 걸맞게 모로 누워 개를 쓰다듬는 주인공의 마지막 모습은 모든 문제가 해결됐지만 끝내 아무 것도 해결되지 못한 상황을 훌륭하게 압축해 보여준다. 또 이전까지의 플래시백과는 달리 아들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다니엘의 '유언' 장면엔 상당한 울림이 있다.


김이 빠지는 건 <추락의 해부>가 이 모든 미묘한 암시를 관객이 궁리하도록 만드는 대신 직접적인 대사로 설명해준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아빠가 자신을 개에 비유한 거였어요"라는 말로 산통을 깨는가 하면(그걸 누가 모르나?), 마지막 장면의 감흥도 "이겼지만 보상도 없고…" 운운하는 변호사와의 대화를 통해 이미 설명된 적이 있어서 다소 반감된 상태로 다가온다.


영화는 그날 산장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보다는, 이미 벌어진 사건이 남은 자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탐구한다. 앞서 말했듯 영화는 이런 의도를 이미 작중 인물의 대사를 통해 밝힌 바 있다. 요약하자면 '법정은 진실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으며, 두 개의 개연성 있는 스토리 중 하나를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둘 중 어느 스토리가 맞느냐가 아니라, 관객(배심원)인 내가 하나의 스토리를 왜 선택했는가, 즉 내가 그 스토리를 통해 어떤 의미를 얻고 싶은가, 이다' 정도가 되겠다. 영화를 보며 나는 이런 뻔한 이야기를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선언했으니 보다보면 분명 이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런데 영화를 끝까지 보아도 이 이상의 무언가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는 관객이 영화의 숨겨진 의도를 눈치채지 못할까봐 힌트를 너무 많이 던져주는 영화를 그다지 좋게 보지 않는다. 게다가 그 숨겨진 의도라는 것조차 훌륭한 법정물이라면 (굳이 뻔한 대사를 통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더 은근한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장르적인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법정물로서는 낙제점을 받을 법한 이 영화의 존재 의의는 과연 무엇일까?


결국 이 작품엔 '미스터리'가 너무나 부족하다. '살인을 했는가, 안 했는가?'를 둘러싼 미스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니엘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산드라는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객이 이들의 대사를 통해 알 수 없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대신 관객이 이들의 표정과 행동을 통해 짐작만 할 수 있게 만들었어야 했다. 이 영화에서 관객이 짐작할 수 없는 이면을 지닌 존재는 개밖에 없다. 바로 그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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