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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자식의 입장에서 바라본 한 남자의 일생

by 봉필


나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아버지의 존재를 빼놓을 수는 없다. 한 명의 남자로 살아가면서,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나와 교류하고, 또 남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일깨워준 '아버지'라는 존재는 어느 누구에게든 특별할 수밖에. 인간 본성으로서는 거의 최초의 감정과도 같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말미암아 어머니를 고생시켰던 아버지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도 어느 정도 가지고는 있었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나 역시 한 남자로서 인생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에 동감하며 아버지에 대한 동정과 약간의 존경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코흘리개 시절에는 영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슈퍼맨, 배트맨과 같은 영웅들의 면모를 아버지에 투사하며, 모진 세상의 풍파들에도 아버지 뒤에만 있으면 안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었다.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도 한 명의 남자이자 약 40억 인구 중 한 명에 불과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차차 깨달아 갔지만 말이다. 태초부터 품어왔던 아버지에 대한 이상과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들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것임이 분명했다. 든든한 인생의 방파제라고 생각했던 이가, 알고 보니 그저 외로이 떠있는 하나의 섬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은, 처절하게 가슴에 사무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다들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겠지.


1960년 2월 5일에 세상에 태어난 나의 아버지는 2022년 4월 3일 세상을 떠났다. 폐암이라는 이름의 병이 원인이었다. 내가 아직 고등학생이었고 부모님은 돈가스 장사를 해나가던 시절, 일찍이 아버지는 결핵을 앓으며 폐의 건강함을 한 차례 잃었지만, 그런 고비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담배를 끊어내지 못해 병을 얻어 그렇게 세상과의 작별을 나누었다. 건강을 살피지 않은 당신의 어리석음에 지금까지도 때때로 한탄을 늘어놓기는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곱씹으며, 그저 그렇게 될 일이었겠지- 하는 푸념으로 숱한 생각들을 갈무리하곤 한다. 어쩌면 그렇게 아버지의 삶은 그렇게 마무리될 것이 예정되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나의 아버지로 태어나 형과 나를 낳으시고, 예순을 갓 넘긴 시기에 병을 얻어 가는 인생으로 진즉 만들어져 있었을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구태여 아버지의 담배를 끊지 못한 습성을 탓할 필요는 없어진다.


아버지의 삶을 돌이켜 보면, 좋은 아버지나 좋은 남편이었는지에는 약간의 의문이 남는다. 늘 어린 시절부터 다혈질이었던 아버지가 어쩐지 무섭기도 했었고, 사업 실패로 인해 어머니를 고생시키기만 했었으니 말이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를 어린 시절부터 지켜본 바, 부부간에 예의를 바탕으로 존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좀처럼 받지도 못했었다. 부모님 세대에는 그런 모습들이 흔했다는 식의 합리화는 나를 납득시키기에 충분치 않다. 그렇다고 나쁜 아버지나 나쁜 남편이었냐고 묻는다면, 거기에 대해서도 고개를 가로젓게 된다. 악한 습성을 가질 정도로 아버지의 천성은 어둡지 않았다(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어릴 적에는 아버지의 노고와 단단한 책임감이라는 단면만을 보았지만, 어른이 되고 보니 노고와 책임감을 어느 정도 갖추기는 했으나 아버지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생뚱맞게 철없는 부분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내가 철이 일찍 들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에게만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얼른 성공해서 어머니를 고생길에서부터 해방시켜 줘야겠다는 생각을, 고등학생 시절부터 품어왔던 나였다. 그렇게 아버지는 당신의 삶을 통해서 나름의 교훈이라고 할 만한 '단단하게 성장해 가는 삶에 대한 의미'를 나에게 은연중에 일러준 셈이다. 아버지는 나에게 다른 산의 바위(타산지석)와도 같은 것이었던 셈이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수많은 빚을 떠안게 된 부모님의 고생스러운 모습을 어린 시절 내내 옆에서 지켜봐야만 했었다. 아버지는 공장일이나 일용직 노동을 하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었고, 어머니 역시 식당일이나 공장일을 전전하며 고생에 고생을 거듭해 나갔다. 다만 두 분의 삶에 차이가 있었다면, 아버지는 일 외적인 시간에 보다 자유로운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 나가며 숨통을 틔운 데 반해, 어머니에게는 그런 쪽으로 자유가 전혀 없었다. 일을 마친 뒤에도 집안일이나 가정에 관련된 부분들을 신경 써야만 했으니 정말이지 24시간 내내 여유가 없는 삶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시절, 어머니라면 꿈나라에서도 무언가 주섬주섬 해나가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스러운 마음이 들 정도다. 그 당시에는 감히 많은 부분들을 헤아릴 수 없었던 어린 나였지만, 은연중에 아버지의 삶보다는 어머니의 삶이 훨씬 더 수고스러운 부분이 많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나와 형을 길러내느라 고생 중이었던 아버지를 마냥 원망하지는 않았지만, 아내에게 힘든 길을 내달리게 하는 한 명의 남자였다는 점에서 아버지에게 미약하게나마 미운 감정이 생겨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어느덧 우리들이 건장하게 자라나 형이 어엿한 직장을 가지게 되고 나 역시도 일시적이긴 했지만 직업 군인이었던 시절, 우리 가족은 모두가 힘을 합쳐 마침내 집을 장만할 수 있었다(절반 이상이 은행 지분이기는 했지만). 내가 전역했던 2016년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마음 한 편의 짐을 조금 내려놓은 듯했다. 여전히 어머니는 공장일을 다니고 있었고, 아버지는 1톤 봉고로 화물 운송업을 해나가던 시기였다. 안산 공장에서 꾸준히 일을 해나가던 아버지는, 회사 내의 갈등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아오다가 2015년 전후로 퇴직을 하고 용달 일에 뛰어들었다. 처음 1~2년은 꾸준히 일에 재미도 붙여가며 열심인 듯했으나, 집을 장만하고부터는 업무에 다소 느슨해진 기색이 없지 않았다. 개인사업자다 보니 원하는 날에 일하고 원하는 날에 휴식을 취하는 것이 가능했는데, 점차 그 빈도가 반반으로 맞추어지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고. 아버지는 일을 나가지 않는 날이면 동네 당구장을 상시로 들락거렸더랬다. 생각해 보면 쉬는 날이든 일하는 날이든 언제나 밤이면 아버지는 술에 취해 있었던 것 같다. 쉬는 날이면 당구장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한 잔, 일하는 날이면 고된 노동을 마치고서 한 잔. 그렇게 서서히 당신의 건강을 갉아먹었던 듯도 하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화물 용달을 하고부터 아버지의 수입은 상당히 유동적인 편이어서 아버지가 공장에 있을 때보다 가계에 보탬이 되지 못했다고 한다. 가정의 현실을 생각하면 아버지가 공장에 남아있는 편이 나았으나 아버지의 개인적인 스트레스 등의 이유로 계속해서 있을 것을 권하지는 못했었다고, 훗날 어머니는 말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아버지의 철없는 생각과 행동들에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온전히 고생을 떠안아야 했던 어머니가 더욱더 안쓰러웠다. 나중에 결혼을 하여 가정을 갖게 된다면, 아버지처럼은 하지 말아야지. 그런 생각들이 어른이 된 나의 마음속에서 점점 커져만 갔다.


그리고 형이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내가 아직은 경찰 시험을 준비하고 있을 그때에 아버지는 폐암 4기 진단을 받았다. '암'이라는 단어는 뉴스나 드라마 속에서나 접했지, 실제로 내 인생 속에서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시기였다(이제는 그것이 꽤나 흔한 질병임을 안다). 코로나19가 창궐하던 초창기에 아버지의 마른기침이 멈추지 않아 병원에 입원하여 검사를 받을 때였을 것이다. 팬데믹 상황 속이라 이래저래 입원 기간이 생각지 못하게 길어졌었다고. 첫째 날 형이 밤을 새운 탓에 내가 교대차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향한 날, 그때까지만 해도 심장에 물이 차 있어서 그것만 빼내면 괜찮을 것이라는 다소 가벼운 이야기 정도만 듣고 간 상태였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향한 병원에서 보호자를 찾는 의사의 부름에 찾아갔더니 웬걸, 청천벽력과도 같은 그 '암'이라는 단어를 가족 중에 내가 가장 먼저 들어야 했다. 울컥- 하고 눈물이 났다. 이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어떻게 전해줘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고, 듣자마자 울음을 터뜨릴 어머니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었다. 아버지의 암은 그렇게 예고도 없이 우리 가족에게 들이닥쳐왔었다.


성격이 불 같았던 아버지를 환자로서 대해야 했던 2년이라는 기간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고통의 나날들이었다. 물론, 당사자인 아버지가 가장 아프고 또 서글펐을 것이라 짐작도 하고 깊은 이해도 하지만,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참아내야 하는 입장에서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닥친 재앙임이 분명했다. 질병까지 얻어 신경이 한껏 날카로워진 아버지를 피해 잠시 자취를 하기도 했었다. 아버지를 생각한 마음에 내뱉었던 쓴소리들에 아버지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괴로워했고, 그런 아버지를 옆에서 돌보아야 했던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고. 아버지의 병마에 내가 주는 스트레스까지 얹을 수는 없어서 취했던 결정이었다. 몇 개월 만에 아버지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결국 나의 자취는 순식간에 막을 내렸지만 말이다.


불과 몇 년 전의 우리 집안에는 우울한 기운이 한껏 감돌았었다. 내가 경찰에 합격한 경사 이후로 웃을 일들은 계속해서 줄어가기만 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롭게 흔들리는 가늘고 얇은 장대 끝에 온 가족이 올라가 있는 듯한 형국이었달까. 나는 아버지의 지난 인생이나 병마와 싸우는 순간에도 당신의 성격을 누르지 못하는 모습들에 크게 실망한 상태였고, 어머니 역시 그런 아버지 옆에서 간호를 지속하는 일상 속에서 차츰 시들어가는 중이었다. 갓 태어난 딸을 돌보면서 자신의 가정생활을 가꾸어 나가기도 벅찼던 형 역시도, 그런 아버지로 인해 신경이 한껏 분산된 상태로 바쁘게 살아갔다. 어느 한 부분이 조금이라도 삐끗 댄다면, 누군가 톡- 하고 건드리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을 당시 상황에서 아버지는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생을 마감했다. 정말 어이없게도, 사회에 만연한 코로나 바이러스를 피해 갔었던 병원에서 입원해 있는 동안 감염된 코로나19가 직접적인 사망 원인이었다. 마침 팬데믹이 심각했던 상황이라 아버지가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마저도 격리병동에 있어 면회가 제한된 상태였고, 가까스로 얻어냈던 격리병동 모니터를 통한 면회 시간에도 수면제에 취해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던 아버지와는 대화 자체가 불가능했었다. 사망 선고가 내려진 이후에도 손 한번 잡아주지 못했고, 얼굴 한번 어루만지지 못했다. 그것은 장례과정 전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바이러스가 외부로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아버지의 시신은 특수 비닐팩에 싸여 있어야만 했으니까. 그 검정 비닐팩 위로 수의가 싸이고, 그 아버지의 시신이라고 하는 것이 불가마 속으로 들어가 타오르는 장면을 보면서도 어쩐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것이 퍼뜩 실감이 나지가 않았다. 이런 게 죽음이라면, 받아들이는 이들의 입장에서 너무 잔인한 것이라는 생각만이 떠갔다. 가족의 시신을 두 눈으로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가족들에게 죽음을 받아들이라니, 이보다 잔인한 상황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 떠가는 생각들로 아버지의 장례기간을 보냈었다.


'투캅스'


아버지는 병마와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도 내가 경찰이 된 사실에 크게 기뻐하며 자랑스럽게 카카오톡 프로필에 위의 글자를 새겨 놓았었다. 형에 이어 동생인 내가 경찰이 되어서, 두 명의 경찰관 자식을 두었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셨다고. 당신의 건강만 챙겼더라면, 그 기쁨은 지속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리도 허망하게 가버렸을까 싶은 마음이다. 인생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그의 생에 존경까지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 특유의 순수함 때문에 미워할 수는 없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인생의 많은 부분들을 스스로 깨달아 갔다. 가장의 무게라든가 남자의 책임감, 그리고 아내에 대한 사랑. 정석적인 모범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어느 정도의 가르침을 이끌어낼 수 있으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다. 이런 아버지가 없었다면, 내가 그런 생각들을 관철시킬 수 있었을까. 그런 의미로 아버지는 나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충분히 다 해냈다고 말할 수가 있는 셈이다.


아버지와 이별한 이후로 좀 더 강한 남자가, 그리고 더 멋진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더욱더 굳세게 다짐해 나갔다. 평생을 고생만 한 어머니는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어머니에게 고생을 안겨줄 수는 없었다. 좀 더 책임감을 가지고 아버지가 없는 만큼의 공백을 내가 메워야만 했다. 나는 더 열심히 투자에 대한 공부를 지속해 나가면서 제대로 된 인생 계획을 차근차근 세워 나갔다. 건강에도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마음먹고 운동도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매일매일 성장해 나가며 한 명의 남자로서 제대로 인생을 마주하며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와의 정신적 이별은 남자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 순간에 어느 정도 그런 과정을 거칠 수 있었고, 마침내 인생의 한 시점에서 아버지와 실질적으로 이별하며 인생의 제대로 된 무게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어차피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소중한 이의 죽음은, 일순 그 사람을 무너뜨리지만 그럼에도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상실은 또 다른 성장으로 채워나갈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니 말이다. 아버지와의 생전 마지막 통화에서 전하지 못했었던 말을 이 글을 통해서나마 전해볼까 한다. 가끔은 어머니에게 모진 남편이었고, 때로는 가정에 무책임한 아버지였지만, 그럼에도 당신에 대한 마음을 담은 한마디.


"사랑합니다"


KakaoTalk_20241207_225459456.jpg 2016년 제주도 가족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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