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순경의 지구대 파출소 적응기
중앙경찰학교에서 교육을 마친 나는, 기존의 지망대로 우리 동네 시흥 경찰서에 배치를 받을 수 있었다. 내가 희망한 지역에 쉽게 배치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사소하지만 특별한 비하인드가 있다. 바로, 많은 경찰 교육생들이 시흥이라는 동네에 배치받기를 꺼려한다는 사실. 말하자면, 경기도 '시흥'은 교육생들 사이에서도, 그리고 실무에 근무하고 있는 경찰관들 사이에서도 비인기서라 불린단다. 그 이유는 서울을 제외하고 전국에 있는 모든 경찰서들을 통틀어 유독 신고가 많고 강력 범죄의 신고 비율이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높기 때문이다. '안시평'이라는 말은 경찰들, 그리고 경찰을 준비하고 있는 수험생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한 단어다. 강력 범죄 비율이 높고 신고 건수가 다른 지역에 비해 높은, 경기남부청 지역의 안산, 시흥, 평택의 앞글자들을 따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아무튼 그 '안시평'은, 내가 중앙경찰학교에 머물 당시에도 교육생들이 자신의 지망에서 철저하게 배제했던 지역이었다.
경찰 교육생들은 중앙경찰학교에서의 성적을 바탕으로 자신이 원하는 지역을 지망하여 배치를 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지역에 지망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좋은 성적이 뒷받침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처음부터 내가 자란 동네인 시흥을 지망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교내에서는 오롯이 기본적인 지식 습득 정도의 목적으로만 가볍게 수업을 들을 수 있었고(그래도 기본적인 교육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정말로.), 독서나 글쓰기 등 내가 별도로 하고자 하는 활동에 온전히 집중해 나갈 수가 있었다. 그렇게 성적은 임용평가에서 합격점을 받을 정도의 성적만을 유지했고, 당연하게도 시흥 지역에는 지원자가 없었기에 1 지망으로 배치를 받아낼 수가 있었다고. 나중에 같은 서에 배치받은 나머지 동기들과 대화를 통해 알게 된 바, 1 지망으로 온 사람은 여덟 명의 시흥서 동기 중에 나 하나밖에 없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다른 지역을 지망했지만 성적순으로 밀려나서 떠밀리듯 시흥으로 배치를 받게 되었다고.
이전 글에서도 말했듯이 내가 살고 있는 시흥시 정왕동은 동네 특성상 공업단지에 근무하는 근로자들의 거주단지로 조성된 동네이다. 그런 연유로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특히 중국인들과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많다)이 거주하고 있는데, 다양한 문화가 섞여 있다 보니 아무래도 마찰이 잦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각종 범죄들이 건수 자체도 타 지역에 비해 월등히 많은 편이기도 하지만, 범죄 자체가 더 다양하게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 강력 범죄들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편이라 많은 경찰 교육생들이 꺼리는 상황도 충분히 이해가 갈 정도다. 다른 시골 지역이나 도심으로부터 떨어진 동네에서만 근무한 경찰관들은, 정년퇴직까지도 흉기를 동반한 강력 사건 신고 출동 경험이 손에 꼽을 정도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시흥시, 특히나 정왕동에서는 그런 신고가 잦으면 일주일에 한 번, 적어도 이주일에 한 번 정도는 발생한다고 보면 된다. 결코 만만하게 볼 동네는 아닌 셈이다.
경찰 공무원이 되기 위한 시험 과정도 거치고, 4개월 간의 교육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받은 상태로 시흥서 내 지구대로 발령받았던 나였지만, 실무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도 없었고 들은 바도 없었다. 이미 지구대 짬밥이라고 하면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형이 같은 지역에 근무하고는 있었지만, 조언을 듣는다고 해도 별반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어림짐작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름의 매뉴얼이나 행동 요령 등을 교본과 교육을 통해 배우기는 했지만, 이미 경찰학교 교수님들도 직접 현장에서 부딪쳐가며 배워야 하는 일이라는 언질을 미리 해주기도 한 상태였다. 그런 짐작은 역시나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처음 근무하는 순간부터 내가 스스로 판단해 가며 나름의 요령을 터득해야만 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선배들 역시도 일일이 설명하거나 지시할 정도로 여유를 가질 수 없는 돌발 상황들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현장이었다. 말 그대로 '긴급 신고'로 인해 출동하는 업무였으니 당연했다. 시민들의 눈에는 신고를 받고 출동하는 수많은 경찰관들과 같이 똑같은 제복을 입고 있는 한 명의 경찰관으로 보였겠지만, 나는 여전히 실습생으로서 중앙경찰학교 교육생일 뿐이었다. 학교를 떠나오기는 했지만, 정확히 4개월의 실습기간을 거친 뒤에야 마침내 졸업을 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1인분을 하는 경찰관이라고 말하기에 한참은 부족한 상태였었다고. 매 근무마다, 매 신고마다 새로운 상황들을 맞닥뜨려야 했고, 가끔은 어리바리한 상태로 모든 것을 혼자 떠안아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그 기간 동안 늘었던 것은 선배들의 임기응변을 모방하는 능력과 실수를 했음에도 크게 당황하지 않는 태도 정도였다. 아무리 아는 것이 부족하고 완벽하게 해결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 하더라도, 도움을 요청한 시민들 앞에 선 한 명의 경찰관으로서 믿음직스럽지 못한 태도를 보일 수는 없었다는 생각으로 근무에 임했다. 다급한 신고자들 앞에서 덩달아 허둥대면 간단하게 해결될 만한 일도 제대로 풀리지 않을 수 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 맞닥뜨리더라도 당황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도 한다. 현장에서 선배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습득함과 동시에 신고자 앞에서 당황하지 않은 태도를 유지한 채로 생전 겪어보기 힘들었던 다양하고 난해한 상황들을 어떻게든 돌파해 나갈 수가 있었다.
"딩동댕동- 띵동-"
지령실에 접수된 112 신고가 지구대로 하달되면, 경쾌한 신호음과 함께 24시간 켜져 있는 지구대 사무실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신고 내용이 떠오른다. 지구대에서는 신고 내용을 확인함과 동시에 출동하는 순찰차 번호와 출동 사실을 지령실에 알리고, 근무 순번에 맞게 지구대 경찰관들이 돌아가며 출동을 한다. 지구대 근무는, 지구대 사무실에 앉아 전반적인 신고 출동 상황을 살피며 지령실과 지구대 간 중개 연락을 하는 상황 근무, 그리고 지정된 순찰차에 탑승하여 신고 출동을 나가는 출동 근무, 관내를 걸어 다니며 순찰하는 도보순찰 근무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내가 근무했었던 지구대에서는 신고 출동 건수가 많은 데 반해 팀별 인원수가 부족했던 실정이어서 도보 순찰 근무로는 편성된 적이 없긴 했었지만 말이다. 지금도 형을 통해 전해 듣는 바로 지구대, 파출소는 여전히 인원 부족으로 힘든 실정이란다. 의경 폐지와 같은 정치적 문제들이 얽혀 있기는 하지만, 현장 경찰관들에 대한 열악한 처우 문제가 심각하지 않나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보태어 본다.
실습생 신분으로 보냈던 4개월 동안은 제대로 된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 그저 신고 출동 소리가 들려오면 즉각적으로 출동을 했고, 현장에 나가서는 선배들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따라 하기 바빴으며, 나름대로 상황에 맞게 조건반사적으로 대처해 가며 움직여댔을 뿐이다. 말 그대로 본능과 직관으로만 생활해 나갔던 시간들이었다. 언제나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근무 상황 속에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고, 팀 막내로서 함께 움직이는 사수의 눈치도 시시각각 살펴야 했기에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오면 언제나 실신하듯 뻗어버리기 일쑤였다고.
'주간-야간-비번-휴무'의 4조 2교대 근무였기에, 잘만 활용하면 근무 외적인 시간에 충분히 다른 여가 생활을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오만한 기대를 품었던 적이 아주 잠깐 있었다. 그리고 그 기대는 근무 첫날부터 처참하게 무너져 내려 짓밟혔더랬다. 12시간이라는 어마무시한 근무 시간은 그 자체로 주간이든 야간이든 살인적인 스케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지구대의 주 업무가 긴급 신고 출동이기에, 언제 어느 곳에서나 빠릿빠릿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긴장한 상태로 근무에 임해야만 했다. 근무하는 시간 동안은 어쩔 수 없이 온신경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근무하는 날이 한가하든 바쁘든 출근과 동시에 긴장의 끈을 붙잡고서 퇴근 시간까지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지구대 근무의 고통은 지독하게 온몸과 정신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간 근무는 아침 6시 출근이라, 이른 새벽 5시쯤에 충분치 않은 잠을 떨쳐내며 일어나야 했기 때문에 피곤했다. 야간 근무는 저녁 6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의 밤샘 근무였기에 피곤했다. 야간 근무 같은 경우에는 근무 중 법정 휴게 시간이 있기는 하나, 출동 인원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언제든 벌떡 일어나 달려가야 했기에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었다. 야간 근무가 끝나면서 동시에 시작되는 비번 날은 보통 퇴근한 아침에 잠들어 오후 두세 시쯤 기상하곤 했다. 비몽사몽한 상태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저녁과 밤을 맞이해야 했던 허무한 날들이었다. 그리고 온전히 휴식으로 찾아오는 줄 알았던 마지막 휴무날은, 다음날 주간 근무를 앞둔 상태에서 새벽에 일어나 출근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며 제대로 쉬어본 기억이 없다. 그야말로 지옥과도 같은 교대 근무의 쳇바퀴였다. 여가 생활이라고? 어림도 없지.
말이 좋아 이틀 출근에 이틀 휴무이지만, 주야가 뒤죽박죽으로 엉켜버리니 생체 리듬은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제대로 된 휴식조차 취할 수도 없어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자각조차 하기가 힘겨운 시절이었다. 2,3년을 지구대, 파출소에서 근무한 같은 팀 형들은 1년 정도면 어느 정도 적응이 될 것이라고 으스댔지만, 그것이 과연 진정한 적응을 말하는 것인지, 이미 상할 대로 상해버린 몸뚱어리를 짊어진 채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떠들어대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누가 봐도 그 형들은 건강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실제로 교대근무는 인체에 심각한 해를 끼치기 때문에 2급 발암 물질로 분류되어 있기도 하다. 지구대 근무를 이어가는 동안 야간 근무가 끝날 때쯤 심장이 강하게 요동치거나, 지나치게 몰려오는 피로에 몸을 제대로 일으키지 못했을 때도 더러 있었다. 그럴 때마다 죽음은 언제나 인생과 가까이 붙어있다는 말을 그 문자 그대로 실감해야만 했다.
"넌 무슨 10년 근무한 애 같냐"
같은 팀 부팀장님으로부터 실습생 기간 동안 종종 들었던 농담이다. 실력적으로나 경험적으로 모자란 상태에서 잦은 실수를 범했던 실습생 시절이었지만, 지난 인생 속에서 얻은 경험들을 바탕으로 어쩐지 마음만큼은 약간의 여유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어차피 모든 일들은 반복과 숙달을 통해서 열심히 노력해 나가기만 한다면 흘러가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어느새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시기였다. 일찍이 경험했던 군생활에서도 그랬고, 일본 워킹홀리데이 시절에도 그랬고,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 그리고 경찰 시험을 준비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매 순간들에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서 집중하여 노력한다면 아무리 험난하고 막막한 일이라 할지라도 못해낼 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맘때쯤 나는 서두르지도 않았고 지나치게 불안해하지도 않았다. 당장은 실습생의 신분이어서 부족한 부분들이 많을 수밖에 없지만, 열심히 근무하면서 더 나은 경찰관이 되고자 노력한다면 그리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뚜렷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면, 불안해할 필요가 전혀 없다. 시간은, 언제나 노력하는 자의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