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한가했지만, 때로는 미치도록 답답하기만 했었던 기대마에서의 나날들
앞선 글에서 비교적 단순하고 한가했다는 말로 기동대 생활을 수식하기는 했었지만(비교적 사실이기도 하고), 출근과 퇴근이 있고, 일에 임한다는 어느 정도의 각오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면 사람이 하는 어떤 행위이든 고충이라는 것은 따라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기동대 생활이라고 마냥 편하고 즐겁지만은 않았다. 때때로 심각해지는 집회 시위에서 시위대와 격렬한 몸싸움을 해야 하기도 했었고, 때로는 사열에 대비해서 무의미한 보여주기식 상황 훈련을 해야만 할 때도 있었다. 흔한 직장인들의 생각으로, 직장 생활에서 다 겪어가는 것들 아니냐는 식으로 치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사실 현직에 있을 때 나의 생각들이 그러했다), 경찰관 기동대라는 직장을 경험해보지 못한 시민들 쪽이 훨씬 많을 것이기에, 그런 사람들에게 기동대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한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묵묵히 써 내려가 보도록 하겠다.
서울청 기동대만큼 빈번한 정도는 아니지만, 경기남부청 기동대도 비상 상황이 닥치면 불시에 동원되어 마구잡이식으로 부려지곤 한다. 지난 윤석열 대통령 계엄 사태와도 같이 말이다. 사회적 혼란이 초래되는 상황에서는 경찰 경비 부서인 기동대들이 우선적으로 발 빠르게 배치된다. 최후의 보루와도 같은 비상전력인 군병력을 동원하는 것은 오히려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상황에서 경찰력, 그러니까 기동대원들이 먼저 동원되는 것이다. 우리가 뉴스에서 접하는 집회 시위나 소요 상황들에서 늘 경찰관들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유도 그런 데에 있다.
기동대원들의 말과 행동에는 어떠한 정치적 견해나 자유 의지가 담겨 있지 않음을 모든 국민들이 알아주었으면 한다. 군인들이 그저 국가의 부름으로 인해 국방의 의무를 짊어지고 명령을 따르듯이, 경찰관 기동대 직원들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윗선의 명령에 철저하게 따르고 있는 것일 뿐, 거기에는 어떠한 사적인 감정이나 사상 같은 것들은 깃들어 있지 않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어떠한 특정 사상을 지닌 시민들, 혹은 그저 평화적인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시민들이 경찰력과 대치하고 부딪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없는 몸싸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어떠한 사상적 비호를 위해 그 자리에 방패를 들고 버티며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출근하라는 부름에 출근을 하여 방패를 들고, 그 자리에 서 있으라는 명령에 그저 서 있을 뿐이다. 가끔 시위가 격해지고, 모여든 군중이 감정적으로 돌변할 때마다 그런 무의미한 대치 상황을 겪어야만 했었는데, 방패를 들고 서 있는 입장에서 언제나 그런 현실들이 답답하면서 안타까웠다. 사실상 아무런 생각도 없이 서 있는 그 자리의 경찰들을 향해서, 경찰들이 인권을 탄압하네, 혹은 자신들의 길을 가로막고서 누구 편을 들어주네 소리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저 자신들의 논리에 끼워 맞추기 위해서 우리가 서 있는 현실 상황을 이용할 뿐, 진정 왜 그렇게 서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생각하고 배려해주려 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들도 그저 한 사람의 직장인일 뿐이라는 현실을 왜 생각해주지 않는 걸까. 다소 안타까운 마음이다.
이따금씩 사태가 급격히 폭력적으로 번질 때면, 경찰 측이든 집회를 주최한 측이든 서로가 이성을 잃는 상황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어르고 달래면서 진정시켜도 분노에 휩싸여 경찰들에게 마구잡이로 덤벼대는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태도에도 불구하고 누그러지지 않으면, 경찰관들도 사람이다 보니 다소 흥분하여 통제를 잃게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될 때도 있다. 그런 상황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의 현장이 될 뿐이었다. 나는 그런 상황이 닥칠 때마다 인간의 내면 깊숙이에 자리 잡고 있는 추악한 면들을 낱낱이 목격이라도 한 듯, 인류애에 대한 생각을 여러 번 고쳐먹어야만 했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당연하게도 인류를 사랑하지만, 어쩐지 그런 사랑을 만인에게 베풀기는 역부족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가며 내 정신을 한껏 어지럽히곤 했었다고. 이성을 잃고 감정만이 지배한 무리들의 타락한 모습은 마치 짐승과도 같은 것이었다(경찰이든 시위대든 마찬가지다).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그저 출근하여 동원되었을 뿐인 경찰관들을 상대로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어리석은 모습들은 때때로 참아주기가 힘들기도 했었다. 아무튼,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참상들은 내 기억 속에 여전하다. 트라우마로 남은 정도는 아니지만, 무심코 채널을 돌리던 중 뉴스에서 집회 장면이 나오기라도 하면 그런 악몽들이 이따금 되살아나 잔잔했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곤 한다.
2022년 10월 벌어진 이태원 참사 이후에는 불필요하게 경찰 인력들이 과다 동원되기도 했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사고였다. 이 글을 빌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는 바이다. 나는 그 사태가 벌어질 당시 한 사람의 경찰관으로서 그저 누구의 책임인지, 그리고 시민들의 관점에서 경찰 조직이 어떤 식으로 보이게 될 지만을 중시했던 조직의 대처에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당시의 사고 이후 기동대는 군중이 밀집되는 지역이라면 지방에서 열리는 콘서트든 축제든 가리지 않고 배치되며 근무를 이어나갔었다. 실질적인 도움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저 '사고 대비'라는 어설픈 명분만을 살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근무들이라는 느낌이었달까. 명확한 기준이나 매뉴얼도 없이 중구난방으로 각종 행사나 축제들마다 경찰력이 낭비되었던 셈이다. 그렇게 한동안 무의미한 근무가 이어지기도 했었다.
상황 출동이 없는 날이면 사무실에서 대기를 하지만, 일단 출동을 나가게 되면 우리의 든든한 보금자리가 되어주었던 공간이 있다. 바로 경찰관 기동대 버스다. 근무하는, 그리고 근무했던 직원들에게는 음어인 '기대마'로 훨씬 더 친숙한 곳이다. 내가 기동대로 발령받았던 당시부터 다행히 신형 버스로 개량이 되어서 보다 넓은 공간에서 근무 간 휴식을 취하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이전에는 각 좌석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구조여서 덩치가 큰 성인 남성들이 줄지어 앉아있으면 숨 쉬는 것조차 불편했었다고(전해 들었다). 내가 개량되기 이전의 버스에서 생활해 보지는 못했으니 뭐라 덧붙일 말이 딱히 떠오르지는 않는다. 다만, 기동대 내 팀장님이나 부팀장님의 말을 들으며 상당히 힘겨웠겠구나, 짐작 정도만 해볼 뿐.
보통 기동대별로 세 개의 제대 정도로 나뉘는데, 기대마는 각 제대별로 한 대씩 배정된다. 시위가 집중되거나 한창 중요한 시기에는 지방청 내 여러 기동대가 함께 같은 지역으로 배치되어 세 대가 한꺼번에 움직이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한가한 시기에는 방범 순찰을 각각 떨어져 있는 도시로 따로 배정받곤 한다. 그럴 때면 기동대 내에서도 각 제대별로 구역을 설정하여 교대근무를 진행했었다. 제대별 인원은 대략 20명 안팎이라 보통 한 시간 정도 2인 1조로 돌아가면서 정해진 시간 동안 순찰을 돌고 나머지 시간에는 휴식을 취하고, 또 순찰 시간이 되면 기대마에서 하차하여 근무를 나가는 식이었다. 가끔 도심에서 형광 조끼를 입고 순찰을 하는 경찰관들을 볼 수가 있는데, 그들이 바로 기동대원들이다. 돌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은, 그와 같은 정말 단순하고 지루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기대마는 당일 근무지 내에서도 도심 내 교통의 불편을 초래하지 않는 어딘가에 주차한다. 그리고 차내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인원들의 편의를 위해 정박해 있는 동안에도 시동이 지속적으로 걸려 있는 상태로 차량은 공회전을 이어간다. 무더운 여름날에는 에어컨을 틀어놓고, 추운 겨울에는 히터를 틀어놓아야 하기에 언제나 기대마의 시동은 꺼지는 법이 없다. 아, 제대의 모든 인원들이 밥을 먹으러 갈 때 빼고.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이라면 보초 근무, 혹은 순찰 근무 정도로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큰 집회나 시위 현장으로의 출동이 아니라면, 아예 사무실에서 대기하거나 혹은 인근 도심 방범 순찰, 교통 근무(말이 교통 근무이지 방범 순찰 근무와 별 차이가 없었다)를 그런 식으로 이어갔다. 아무리 버스가 개량되면서 편해졌다고는 하나, 제대로 된 책상과 의자가 아니다 보니 기대마 내에서는 일정 시간 머물다 보면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근무 외적인 휴식시간에는 다들 각자 하고 싶은 일들에 열중했지만, 결코 편한 상태에서 휴식을 취했다고는 말하기가 힘든 지경이었다고. 나는 주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또 투자 공부를 해나갔지만, 대부분은 불편한 자세로 스마트폰 게임을 한다거나 유튜브를 본다거나 했었다. 당시에는 어쩐지 그런 광경들이 안쓰러웠다. 대한민국 경찰관, 고생이 많구나.
"도시락 왔습니다."
기대마는 휴식 공간이면서, 바쁜 와중에는 우리들에게 식당이 되기도 한다. 한가한 방범이나 교통 근무 때에는 지원받는 식사비를 활용하여 근무 외 시간에 팀별로 자유롭게 해당 근무지 내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올 수 있었지만, 바쁜 시위 상황에서는 그런 안락한 식사가 불가능했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모두가 식사를 해치워야 했기에, 그런 날이면 지방청에서 각 기동대에 도시락을 지원해 주었다. 처음 3,4개월 정도는 맛있다며 그 도시락들을 먹어치웠지만, 그 이후로는 도시락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올드보이 속 주인공이 15년 동안 군만두만 먹으면서 느꼈을 역겨움은 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싶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도시락 업체는 대개 같은 업체였고, 그래서 메뉴 역시도 늘 비슷했었다. 모종의 비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합리적 의심을 모두가 갖고 있을 정도였다. 기동대 생활을 1년 정도 해나갔을 즈음부터는 그런 직원들의 고충이 반영되어 꽤 다양한 업체들로부터 도시락을 제공받았었다고. 그래봐야 도시락이 도시락이기는 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런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가 기동대의 추억으로 남은 듯도 하다. 그렇다고 그 도시락을 다시 먹어보고 싶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지만.
지구대 근무와 비교하자면(지구대와 기동대, 두 곳에서만 근무를 해봤기에 비교군이 다양하지 않다), 수월한 근무임이 분명했지만 나름대로의 고충은 언제나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1년간은 의무적으로 복무를 해야 하는 탓에 많은 순경들이 기동대에서 근무한다는 사실 자체에 늘 불만을 토로했었지만, 정작 나는 그만큼의 불만은 없었다. 과거 4년간 했었던 군생활보다는 훨씬 안락한 편이었고, 나름대로 남는 시간도 많아서 내 미래를 준비하는 데에 십분 활용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모두가 힘겹고 불편한 상황들에서도, 어떤 마음가짐과 자세를 가지느냐에 따라 스스로의 인생에 얼마든지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시간을 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부서에서 어떤 업무를 해나가든 일정 부분 고충은 따라올 수밖에 없고, 특별히 벗어날 또렷한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 안에서 최대한 긍정적일 수 있는 부분들을 찾아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기동대 근무 간, 휴식 시간이나 자투리 시간에 다들 흥미 위주의 유튜브나 게임에 몰두해 있을 때, 나는 차근차근 미래를 준비해 나가면서 마침내 퇴사라는 길에 이를 수 있었다. 피곤하다, 힘들다 투덜대며 지친 상태로 나도 남들과 똑같이 시간들을 허비했더라면, 이렇게 빨리 퇴사할 수는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언제나 내가 목표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그것을 위해 어떤 식으로 나아갈지를 염두에 둔 채 살아간다면, 어떤 고난과 역경 앞에서도 꿋꿋이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