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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또다시 퇴직

마침내 퇴직을 감행했지만 특별한 계획은 없어

by 봉필


2024년 2월 5일 부로, 나는 경찰 공무원 직을 내려놓았다. 회사에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사전에 전달하고, 사직서를 써서 제출하는 과정까지 일말의 망설임도,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다고. 애초에 오래 머물 생각도 아니었고, 조직에 대해 경험해 볼 수 있는 만큼 머물렀다는 생각에서였는지 조금의 미련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사직서를 제출하고 얼마 안 되어 희망했던 퇴직일이 바짝 다가왔고, 같은 기동대 제대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긴 뒤에 무사히 퇴직할 수 있었다. 시원하지도 않고, 딱히 섭섭하지도 않았다. 그저 인생의 한 페이지를 넘겼다는 감각만이 그날 하루 정도 머물렀다가 사라졌을 뿐이었다.


'프로 퇴사러'


프로 게이머, 프로 그래머도 아닌 프로 퇴사러. 어쩐지 진득하게 한 직장에 머무르지 못하는 나를 위해 그런 별명을 누군가가 붙여주었다(누군가가 누구인지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주변의 많은 친구들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도 모르는 그 별명에 고개를 끄덕였고, 나 역시도 가만히 음미하면서 서서히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더랬다. 내 기준에서 제대로 된 직장으로만 따져 본다면, 직업 군인 다음으로 얻은 경찰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그만둔 것이었기에 두 번째 퇴사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이직이나 퇴직 없이 진득하게 한 직장에 머무르고 있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던 상황에서 당당히 프로 타이틀을 거머쥘 수가 있었다고. 어느덧 내 나이는 만으로 서른이었고, 주변인들은 하나 둘 결혼해서 애도 낳으며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에 반해 나는 여전히 방황이라는 단어에 파묻혀 인생을 헤매야만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직장'은 그저 한철을 나기 위해 입는 한 벌의 옷과도 같다는 생각을 이미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나였다. 필요할 때 입고, 필요가 없어지면 벗은 뒤에 다른 옷에 주섬주섬 팔다리를 집어넣듯이 직업도 마찬가지로 필요에 따라 옮겨 다닐 수 있는 것이라고, 인생의 어느 시점엔가 깨달을 수 있었다고. 특히나 투자에 대해 눈을 뜬 뒤부터 직업은 더 이상 나에게 그리 커다란 의미로 다가오지 못했다. 내 세대에서는 보기 드문 사고방식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요즘은 비교적 많이 퇴색되기는 했어도 내가 오래전 고등학생일 때만 해도 '평생직장'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강력한 말이자 하나의 인생 진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 평생직장의 첫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입시'는 우리의 인생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었고, 또 그만큼 치열한 경쟁의 장이 되었던 것이다. 좋은 대학에서 좋은 학점을 바탕으로 누구나 다 들어봤음직한 좋은 기업에 취직하는 것, 그것이 거의 대부분의 내 또래들이 가지고 있는 목표였다. 하지만, 인생이 그렇게 척척- 하고 단계적으로 (어른들이 말하는) 옳은 길로만 나아간다고 해서 행복을 거머쥘 수 있는 단순한 메커니즘이었다면, 수많은 철학과 예술들은 역사 속에서 철저히 외면받아 왔어야 마땅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현대에도 철학은, 예술은 건재하다. 인생의 복잡성은 단순히 하나의 길로만 나타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겠지. 그런 생각들로 나는 처음부터 어른들의 그런 확신에 찬 말들을 무시하며 살아왔다. 인생의 실체는 그런 정도(正道)를 벗어난 복잡다단함 앞에 고심하며 헤쳐나가는 데에 있을 것이라고, 어린 날의 나는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렇다고 반대로,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을 떠안고 살아가는 친구들이 무조건적으로 불행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누구나 자신에게 맞는 모습이 있다는, 보다 성숙한 생각을 이 나이에 이르러 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마크 저커버그 역시도 회색 반팔 티셔츠만을 입고 다니고,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 역시도 청바지에 검은색 맨투맨만을 고집했던 유명한 단벌신사였지 않은가. 옷을 바꿔 입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거나, 꺼려지는 사람은 그 사람만의 길로 나아가면 그만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30년이라는 세월을 살아오면서 어쩐지 그런 인생과는 맞지 않을 것이라는 짐작과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서 변화무쌍한 방황의 길을 지향하며 걸어왔을 뿐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떠한 후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 자신에 대해 일찍이 깨달을 수 있었음에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이 글 자체는 퇴직이나 퇴사를 장려하거나 추천하는 글도 아니고, 나름대로의 퇴직에 관한 조언이나 팁을 전수하기 위한 정보성 글도 아니다. 그저, 이런 인생을 살아감에 나름의 만족감과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사람들이 인생에서 저지르는 크나큰 실수 가운데 하나가, 나 아닌 다른 이들 역시도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아간다는 생각하에 그들의 노하우를 아무런 필터링 없이 자신의 삶에 적용하려 하는 것이다. 누군가 내가 살아온 것처럼 밥먹듯이 퇴사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면, 나는 당장에 추천하기보다는 오히려 정지 신호를 보낼 것이다. 남들이 흔히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가며 좋은 직장을 평생직장으로 삼는 것도 힘겹고 고된 일이지만, 나처럼 나름대로 고생하면서 얻은 직업들을 줄기차게 팽개치며 살아가는 인생 역시도 고달프기는 매한가지이니 말이다. 어디까지나 철저히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성찰과 고심이 곁들여져야 한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인생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식주'를 일궈내는 먹고사니즘일 수밖에 없으니, 스스로의 가치를 창출하여 사회에 공헌하면서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직장이라는 통로는 어느 인생에나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라고 그런 것들에 대해 가벼이 여기고 쉽게 행동한 것이 아님을 알아주기 바란다. 나름대로 경제적인 측면을 심각하게 고찰하고, 직장 외의 통로들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끈질기게 버텨온 결과로 퇴사를 일궈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 너 알아서 해라"


주변인들의 만류나 걱정은 어린 시절부터 드문드문 이어져 왔지만, 이 나이가 되고 보니 현재는 거의 자취를 감춘 상태다. 애초부터 살아오면서 어떤 선택이든 간에 주변인들의 반응은 나에게 조금의 고려 사항조차도 되지 못했었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대다수가 가려하는 방향과는 다소 엇나가 있는 길을 가고자 했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주변의 걱정들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늘 있어왔다. 나름대로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었던 중학생 시절을 뒤로하고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던 고등학생의 나에게 담임 선생님과 부모님은 갖은 걱정들을 한껏 늘어놓았었다. 그것이 나를 위한 걱정이었는지, 당신들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한 말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그런 걱정을 결코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부모의 입장에서, 그리고 인생을 좀 더 살아본 선생의 위치에서 얼마든지 거들어줄 수 있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미성년자일 때에는 경험도, 판단력도 미숙하기 마련이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부모님에게 말했을 때에도 걱정과 염려는 뒤따랐다. 고등학생 때 이미 한 차례 공부 포기 선언을 함으로써 어느 정도 부모님의 기대를 낮춰놓기는 했었지만, 낮은 성적에 맞는 지방대라도 입학해서 졸업장을 수여받기 원하는 부모의 심정은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내가 대학이 아닌 해병대 부사관이라는 길을 택했을 때에도 부모님으로부터의 걱정은 막을 수 없었지만, 그나마 어엿한 직장을 가지게 되었다는 안도감으로 부모님도 아들을 응원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터였다. 전역의 시기가 다가왔을 때에는 심지어 어머니, 아버지의 입장에서 은근히 내가 그곳에 머무르기를 바랐겠지만, 그 기대 역시도 나는 단호하게 꺾어버렸었다고. 직업 군인의 길을 내팽개치고 방황의 길로 들어섰을 때부터 부모님은 어느 정도 나를 어엿한 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믿어주었다(어쩌면 포기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때 내 나이가 스물셋이었다. 이미 성인이 된 이후부터는 집안의 도움을 일절 받지 않으며 나름대로 4년이라는 군생활을 홀로 버텨왔었기에, 나에 대한 부모님의 신뢰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쌓일 수가 있었다는 생각이다.


그 뒤로는, 내가 타지 살이를 위해 일본으로 떠날 때에도, 돌아와 다시 대학을 준비하겠다고 했을 때에도, 그렇게 수험 기간을 거쳐 간 대학을 쉽게 그만두었을 때에도, 부모님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주변의 친구들 역시도 그때쯤부터는 나를 더 이상 정상적인 범위 내의 인간이라고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더랬다. 그저, 자신의 흥미를 토대로 방황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구나. 그런 은근한 평가와 기대가 나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타인의 시선과 비교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으며 스스로의 확신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런 비슷한 경험들이 중첩되면서 나름대로의 아이덴티티가 명확해졌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


이후에 경찰 공무원 준비를 시작할 때부터는 그 누구도 나에게 한마디조차 거드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너라면 할 수 있겠지', '난 왠지 그냥 네가 또 될 것 같다', '어차피 안 돼도 뭐 다른 거 알아서 하겠지'와 같은 진심 어린(?) 응원의 말들을 들을 수가 있었다고. 나 스스로도 인생에 대해 확신하면서 남들이 보기에도 인정할 수 있을 만한 인생을 나는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용기를, 마침내 장착하게 된 셈이었다. 스스로의 자신감과 남들의 기대와 인정이 일치할 때에 인생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시너지를 발휘하게 된다는 생각이다. 나는 실제로 경찰 공무원이 되었고, 또 나름의 변덕으로 그 직을 내려놓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다음에 무엇을 할지, 어떤 일을 저지를지 기대하면서 나의 인생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딱히 보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과거의 경험들과 마찬가지로, 완벽한 준비를 토대로 퇴직이라는 결정을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더 이상 머물러야 할 의미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퇴직을 과감히 감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그렇게 실행에 옮겼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꽤 위로가 되는 사실이라고 한다면, 나름대로 투자 실력을 어느 정도까지 끌어올린 상태여서 경제적인 여건은 절망적이지 않은 상태였고, 여러 책이나 미디어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다른 사업이나 플랫폼들에 관심과 열정을 부으며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 정도. 시간이 흘러넘치고도, 또 남아돌아 어쩔 줄 몰라했던 나의 백수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KakaoTalk_20241216_155642514.jpg 2024년 1월에 제출했었던 사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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