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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백수의 삶

휴식인지 뭔지 뚜렷하게 무어라 설명할 수 없었던, 다만 즐거웠던 나날들

by 봉필


나라고 언제나 계획적으로 그때그때 걸맞은 목표를 향해 명확히 돌진해 가며 살아왔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순간순간 흥미에 따라 열정을 불태우곤 했지만, 좀처럼 흥미가 생기지 않는 분야에서는 최대한 에너지를 아껴왔던 나였다. 게다가, 나태함과 게으름은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이 아니던가.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한 명의 인간이었다. 그 속성이 어느 시기에 발현되느냐에 따라서 인생에서 참사가 되기도 하고, 시의적절한 휴식이 되기도 한다. 나의 퇴사 직후 시기는, 그 참사와 휴식 사이 어딘가에 위치해 있지 않았을까 싶다.


2024년 2월 퇴사를 한 직후에는 경제적인 부분에 온 신경을 집중했었다. 당장에 주기적으로 들어오던 소득이 끊긴 상황이었으니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흐름이었다. 마침 미증시와 비트코인이 본격적인 상승을 시작한 때여서 글로벌 경제에 관심을 기울이며 펼쳐 들었던 공격적인 투자 전략이 아주 잘 먹혀들었고, 나는 두 달 만에 지난 직장에서의 연봉에 달하는 금액을 벌어들일 수가 있었다. 그 일은 나에게 독이었을까 아니면 득이었을까. 아직까지 판단을 내리기가 조금은 힘들다.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당시에는 퇴사 직후에 그런 대박을 터뜨린 것이었으니 기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고. 어쨌거나 당장 그 순간에 불행이었냐 다행이었냐를 묻는다면 다행인 쪽이 분명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글로벌 경제 시황이나 투자 전략들을 공유하는 경제 블로그를 개설하여 포스팅도 꾸준히 해나갔다. 퇴사 전부터 이어나가던 유튜브도 지속하면서 글을 쓰는 블로그에도 간간이 글을 올렸다. 하지만, 인간의 간사함과 게으름은 퇴사 이후의 내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훼방을 놓았고, 게다가 당장에 경제적인 풍족함을 누리고 있는 상황에서 어쩐지 열정이 샘솟지 않았더랬다. 당장 퇴사했으니, 조금은 즐겨도 되는 것 아닐까? 그런 어설픈 생각들로 하는 둥 마는 둥 열정의 불씨를 아예 꺼뜨리지 않을 정도로만 방치하는 수준으로 살아나갔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조급함을 너무나 내려놓은 나머지 지지부진한 상태로 인생을 지나치게 흘려보낸 시기였던 것 같기도 하다. 이 글을 빌어 아주 약간은 반성하는 바이다.


나는 지난 2023년도부터 League Of Legends(약칭 '롤') 게임팬을 자처해 왔다. 원래부터 게임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 실제로 게임을 플레이하지는 않았지만, 게임 중계를 보는 것은 좋아해 왔었다. 하지도 않는데 보는 것을 좋아한다며 남들은 이상하게 여기곤 했지만, 아무튼 나는 이런 쪽에서는 약간 특이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 시절에 TV를 통해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의 중계를 보는 것을 참 즐겼었는데, 그런 추억들의 영향도 없지는 않은 듯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이 게임을 보는 행위에 큰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Faker 이상혁 선수라는 전무후무한 레전드 프로게이머의 서사 때문이다. 한 게임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중이라고 말해도 어색함이 없을 만큼의 커리어를 쌓아가면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뚫고 나아가는 그의 도전적인 모습에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웬 게임이야기냐고?


나의 2024년 백수 생활의 대부분을 이 게임으로 보냈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기 때문이다. 투자 블로그도, 유튜브도, 그리고 네이버 블로그도 가끔씩 곁들이기는 했었지만, 나의 일과는 온통 LCK(롤의 한국리그) 관전에 맞추어져 있었다. 올해 스프링 시즌을 시작으로 서머 시즌, 그리고 국제 대회인 MSI, 롤드컵이라 일컫는 월즈까지. 페이커가 속해 있는 T1이라는 팀의 모든 경기를 라이브 중계로 지켜봤었다. 심지어 광주에서 열린 서머 시즌 결승 진출전에는 직관을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기도 했었다고. 보람찬 백수의 나날들이었다.


그렇게 2,3월의 수익을 기반으로 나태하고 평탄한 삶을 이어가다가, 마침내 8월에 들어 투자 생활에서 큰 위기를 맞게 된다. 바로 2024년 8월 5일에 일어난 블랙먼데이 쇼크 사태였다. 미국의 경기침체 불안과 중동의 전쟁 이슈, 그리고 엔케리 트레이드 청산 이슈가 맞물려 하루 만에 나스닥을 비롯하여 코스피, 코스닥 지수가 일제히 급락했던 사태다. 대부분의 자산을 증권이나 코인으로 가지고 있었던 나는 막대한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고. 올여름까지 시장의 흐름이 좋지 않게 흘러간 탓에 연초 수익을 다 반납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이 사태를 맞이하여 나의 계좌는 완전히 마이너스로 들어서게 되었다. 시퍼렇게 변해버린 계좌는 평화로운 백수 생활에 시끄러운 경고음을 울렸다.


나태하게 살아오면서도 은근히 믿는 구석이었던 '투자'라는 녀석으로부터 철저히 배신을 당해버린 상황이었으니, 나름대로의 돌파구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급함이 급작스럽게 물밀듯이 밀려왔다. 어디 막일이라도 나가야 하나 싶어 인력, 일용직 구직 앱도 설치해 가면서 멀쩡한 몸뚱이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기도 했었다. 지겹게 다툼만을 반복했었던, 성격이 지독히도 안 맞았던 전 연인과도 이별을 고하면서 철저하게 홀로 된 시간 속에서 나름의 해답을 강구해 나가야만 했다. 나의 나태했던 백수 생활은 그렇게 예기치 못한 순간에 불현듯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나름대로 퇴사 전에 꾸준히 해나갈 일들을 계획하였지만, 뜻하지 않게 일이 초장부터 너무 잘 풀리게 되면서 단단하게 다져놓았던 처음의 각오가 생각보다 일찍이 느슨해졌었다.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이어왔던 나날들은 예상치 못한 역풍을 맞으며 다시 한번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던 셈이다. 인생은 참 알 수가 없다. 삶의 어떤 속성은, 뜻이나 의지가 얕은 계획을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철저히 무너뜨리고 방심하는 순간에 결정타를 날려 급조한 배를 침몰시키곤 한다. 퇴사할 때부터 뚜렷한 계획이 없었던 나에게, 만만하게 보지 말라는 나름의 충고를 날리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고심의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이후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짤막한 고심 끝에,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거짓말처럼 쉽게 찾아낼 수가 있었다. 당시 계획했던 행동들을 하나하나 실천에 옮기면서 나는 새로운 확신과 자신감을 차근차근 쌓아나갔다.


KakaoTalk_20241217_230656666.jpg 2024년 6월, 페이커 신전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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