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백수의 이별은 어쩐지 더 서글프다

그냥 그렇다고

by 봉필


'퇴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회사에서 하나의 여정이 마무리되었음을 말한다. 어떤 여행길이든 여독이 남아있기 마련이니, 충분한 휴식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달래줄 필요는 응당 있다고 할 수 있겠지. 그렇기 때문에 퇴사 이후의 백수의 생활에 줄줄이 쉼표가 이어져 있다 해도 결코 어색하지 않다. 그런 생각으로, 당장 미래에 대한 고민이라든가 경제적인 부담과 같은 걱정을 덜컥 집어먹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난 3년 동안 몸 담았던 직장에서 쌓여 있었던 스트레스나 피로가 어느 정도 해소되어 가고 있던 바로 그 시점에서 인생은 나에게 새로이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실패였다. 하나는 사랑(사실 매춘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만)이었고, 하나는 돈이었다. 이번 글은 그 가운데 하나였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그녀를 내 인생에서 통째로 지워버린 지 일 년이 넘어버린 지금 시점에서, 나는 다소 막막한 심정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단어로 포장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것은 '매춘'에 가까운 지독한 악연이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알맞을지도 모른다. 뭐든 지난 추억은 미화해 버리는 인간의 본능으로 말미암아 그녀와의 시간들의 대부분이 지금은 희석되고 또 일부는 희미해져 어떻게든 긍정할 수는 있는 추억이 되어버렸다. 약간은 흐릿하게 김이 서린 안경을 낀 채로 지난 기억들을 되돌아보며 고개 끄덕이며 슬며시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달까. 나의 밑바닥, 인간의 밑바닥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지금까지의 연애를 전반적으로 다시금 되짚어볼 수도 있었고, 결국에는 사랑에 대한 나름의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기에 그녀에게는 나름대로 감사한 마음도 가지고 있다. 서른에 이른 시점에서 특정 관계에 부단히도 노력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정말이지 열렬했고, 지독하게 얽히고설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끈질기게 서로를 잡아당겼다는 점에서 치열했던 관계였다. 그렇기에 그녀에게는 내 첫사랑이라는 칭호와 최악의 사랑이라는 상반되는 칭호를 함께 부여할 수가 있는 셈이다.


지인의 소개로 만난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단언컨대, 감히 모든 남자들의 이상형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어리고 예쁜 여자'에 정확히 부합하는 사람이었다. 편의상 그녀를 J라고 부르겠다. J는 자신이 예쁘다는 사실을 아주 잘 인지하고 있는, 그리고 그 장점을 십분 활용할 줄 아는 여자였다. 지난 남자들로부터 언제나 원하는 것들을 얻어왔으며, 자신의 사랑받는 모습을 남들에게 드러내 보이기를 즐기는 편이었다. 여자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그런 모습들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진화심리학적 특성으로 따져봐도 언제 어디서든 착취를 당하기 쉬운 조건을 타고났으니 대부분의 것들에 경계심을 지닌 채 계산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논리적으로 납득할 수가 있었지. 특히나 이성적 접촉에 있어서는 남자보다 훨씬 더 민감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찌 부정할 수가 있겠는가. 다만, J는 그녀가 지니고 있던 평균 이상의 외모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유난히 그런 점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남들이 가고 싶은 곳은 다 가야 하고, 남들이 입는 것은 다 입어봐야 하고, 남들이 하고 있는 것들은 다 해봐야 하는 사람.


나 역시도 SNS나 유튜브와 같은 매체들을 통해 그런 면면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어왔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과 관계를 맺어보기는 처음이었다. 하루 온종일 그녀가 붙들고 있던 SNS에 떠돌아다니는 유명 맛집에 나는 언제나 태그 되었고, 여행지는 물론이거니와 무조건적인 헌신을 보이는 남자가 나오는 쇼츠들을 언제나 눈에 들여야만 했다. 거기에는 분명 어떤 병적인 집착이 잔뜩 묻어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 애교 정도로 받아들였었지만, 그녀의 실체가 SNS라는 가상 세계에 머물러 있음을 깨닫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일찌감치 J와의 이별이 필연적으로 올 것이란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고, 그 순간부터 오랜 고행을 다짐한 수행자의 마음가짐으로 그녀와의 연애를 끈질기게 이어갔던 것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분명 좋았다(인생의 어느 면이든 장단이 있다). 그 장점을 단순하게 뭉뚱그려 말하자면 대부분 에로스적인 측면에 있었다. 미리 말하건대, 나는 결코 에로스와 플라토닉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우월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굳이 따진다면, 아가페라는 더 상위의 사랑이 있으며 그 밑으로 둘이 비슷한 우열로 나란히 있는 것이라 여긴다. 그러니까, 에로스적인 사랑이 더 열등하다는 핑계로 과거 그녀와 맺었던 관계를 폄하할 생각도 없고, 어떠한 변명을 더하고 싶지도 않다. 아름다운 외모는 분명 이성적 매력 가운데 큰 부분이다. 나 또한 그와 같은 늪에 빠져 한동안 허우적거렸던 셈. 물론, 아름다운 장미는 언제나 숱한 가시들을 지니고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녀의 불같은 성격이 본래 그러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나와의 상성에 의해 불같이 발현되었던 것이었는지는 나로서 알 길이 없다. 다만, 본래적으로 타고난 면도 있었고, 스스로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편이면서 호불호가 나름대로 명확한 나와의 상성이 맞지 않았던 면도 있었을 것이라고 두루뭉술하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외적인 면에만 홀려 내 모든 것들을 쏟아붓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던 시기에 그녀를 만날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보다 혈기왕성하고 앞뒤 재지 않고 돌진하며 피투성이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무모함을 지녔던 20대 초반의 나이에 그녀를 만났더라면, 내 인생은 보다 위태로운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다투지 않은 날을 떠올리기가 힘들 정도로 그녀와는 눈빛만 마주쳐도 (부정적인 쪽으로) 불타올랐었고, 우리는 서로를 할퀴며 상처 주었다. 꽤나 심각한 상황에까지 이르기도 했지만, 파멸로 나아가기 바로 한 걸음 직전에서 우리는 멈춰 선 뒤에 서로에게서 몸을 돌려 각자의 길로 걸어갈 수 있었다. 어떻게든 멀어지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고, 마침내 하나의 계기로 말미암아 각자도생의 길을 쟁취해 냈던 것이다. 다소 지저분한 방식이었지만, 결과론적으로 너무나 잘한 이별이었다.


사랑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내가 그녀와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정의 내린다면, 위와 같은 문장을 끄적일 수 있을 뿐이다.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을 들여다보려 했고, 나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음에도 나름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해 보았지만,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었음을 깨닫고서 다시 나만의 길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 역시도 우리 관계를 어떻게든 이끌어 나가기 위해 이전까지는 하지 않았던 어떠한 노력을 했으리라 믿는다.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해도... 뭐, 그야 별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결국 그녀와의 이별에 있어 큰 계기가 되었던 것은, 앞서 언급했던 두 가지 실패 가운데 하나인 경제적인 위기와 맞물려 찾아왔다. 24년 8월 5일에 일어난 블랙 먼데이 쇼크가 바로 내 백수 생활의 전환점을 가져다준 두 사건의 배경이자 계기였다. 오로지 투자에만 매달려 자급자족을 해 나갔던 터라, 당시 자산이 30% 이상 녹아내리는 것을 두 눈 부릅뜬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나의 심정은 차마 말로는 표현 못할 정도로 어두침침하고 절망스럽고 처참한 상태였다. 그러던 와중에, 언제나 그랬듯 그녀와 사소한 언쟁이 일었고 나는 그녀와의 사이를 위태롭게 이어주고 있던 얇은 실 하나를 툭-하고 건드려 마침내 끊어냈었다. 한편으로 후련하긴 했지만, 주머니도 넉넉하지 못한 상태에서 옆구리마저 시려오니, 쓸쓸함이 얼마간은 온몸을 뒤덮고 있기도 했다. 그 뒤로 그녀는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오래도록 알고 지냈던 연하의 다른 남자와의 연애를 시작했다. 마치 그전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떤 배신감이 마음속에 잠시 일어 증폭되는 듯하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었다. 그저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인연이기도 했고, 지난 인연에 대해 붙잡고 생각하기보다는 당장 내 눈앞에 펼쳐진 위기부터 어떻게든 넘어가야만 했던 시기였다.


이전까지는 호화로운 백수 생활이었다면, 이후로는 보다 현실적인 처참함이 피부로 느껴지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경제적 위기는 어떻게든 극복해 낼 수 있었지만, 내 미래에 대한 고심을 느슨하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든, 정신이 번쩍 드는 전환점은 그렇게 예기치 못한 순간에 나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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