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다니는데, 기독교인은 아니다

어쨌든 사랑 하나는 믿는다

by 봉필


철학하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종교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그리고 그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대해 알고 싶어 할수록 우리는 어떤 명확한 진리라든가 믿음, 신념에 의존하게 될 수밖에.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 특정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 기준이라는 게 어느 현자의 말이 될 수도 있고 역사가 될 수도 있고 내 안에 깃든 특정 감정이나 감성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의 삶과 이 세상을 둘러싼 원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이기에, 그 관심을 조금 더 신비주의 쪽으로 기울이게 된다면 정확히 종교적인 측면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인지할 수가 있다. 러셀이 일찍이 그가 집필한 서양 철학사를 통해 말한 바가 있다. 인간의 역사, 그리고 철학사는 사회를 결집하려는 세력과 해체하려는 세력의 대립이었다고. 인류의 역사 속에서 종교가 해 왔던 역할 역시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나의 교리로 사람들을 묶으려 하기도 하고, 종교 내에서 각종 논의를 발전시켜 세상에 출렁이는 특정 생각이나 관념을 해체하려 애쓰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절대적인 진리이기도 한 종교는, 지금까지 인류 역사 속에서 어마무시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집단이면서, 우리 사회 속 하나의 현상이면서 하나의 철학이자 내가 살면서 탐구해야 할 하나의 영역인 셈이다.


지금이야 다윈의 진화론이 발표된 이후로 합리주의와 과학만능주의가 비합리적인 신비주의를 압도하면서 세상을 뒤덮어버리기는 했지만, 불과 몇백 년 전만 해도 인류의 삶은 합리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종교적 믿음과 신의 계시를 받고서 우리 위에 군림해 있던 왕들에 의해 짓눌려 있었다. 헤겔의 변증법적 역사관으로 해석한다면, 그러니까 인류의 사회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보한다고 믿는다면 그와 같은 비합리성(반)은 그저 지금의 과학적 발전(합)을 위한 토대에 불과한 것이겠지만, 어찌 그와 같이 단순한 입장으로 몇 천년의 역사-실제 인류 문명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상당히 오랜 기간인-를 바보짓이라고 단정 지을 수가 있겠는가? 다시 말해, 사회가 헤겔의 역사관처럼 진보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신비주의적인 요소 역시도 인류 삶에서 결코 반(反)으로 정의 내린 채로 내팽개쳐서는 안 되는 부분일 수 있단 이야기이다. 인류는 지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된 시점에서부터 몇몇 자연물에 대한 믿음을 드러냈고, 그 기류가 현재까지도 여전히 우리 삶 곳곳에 무의식적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진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 다만, 우리가 과학만능주의, 그리고 합리주의에 파묻혀 그것이 무조건 옳고, 또 우리 삶에 무조건적으로 좋다는 생각에만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 역시도 이런 시대에 태어나 (어쩔 수 없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관점들에 조금 더 무게를 싣게 되곤 하지만, 언제나 그와 같은 하나의 편협한 관점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려고 하는 편이다. 누군가에게는 하나님과 예수의 이야기가 터무니없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헤겔의 역사관(헤겔의 역사관이 합리적이라는 의미로 오해하여 받아들이지 말기 바란다) 역시도 다른 누군가에겐 터무니없게 들릴 수도 있는 법이다. 과학 역시도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납득이 가지 않는 방식일 수도 있다. 시간의 흐름을 고려해 본다든가 하나의 관점에 매몰된 상태로라면 종교적인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서사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우리가 태어나 죽을 때까지 하나의 진리를 깨우칠 수가 없는 존재라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이에 대해 검토해 보는 것도 삶에 있어 결코 해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여러 관점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을 해 나간다면 우리는 더욱더 풍부한 자원을 우리 몸에 축적시킬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이미 우리는 어릴 때보다 한참은 더 많은 정보들을, 보다 풍부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최근 들어서 유튜브라는 매체 속에서 내가 구독해 왔던 지식인들의 행보가 결국 종교 쪽으로 향하고 있는 현상에 의해서 나는 또 한 번 종교에 대해 보다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가 있게 되었다. 삶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여전히 완벽하게 해명되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는, 인류가 살아가면서 해결하지 못할 부분이 분명하다. 종교가 어떤 면에서 세상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과학이나 논리, 그리고 어떠한 합리성으로도 결코 정복하지 못하는 부분이 반드시 존재한다. 유한한 인간이 만들어 낸 유한한 과학적 지식과 지혜이니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커다란 두 영역의 한계를 인정하고 각각에서 삶의 정수를 취해낼 수만 있다면, 우리는 마침내 진정한 삶의 조화에 이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는 실존주의의 끝에 위치한 카뮈교에 머물러 있는 내가 언젠가는 예수 밑에서 고개를 조아린 채 마음속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삶에 대한 기도를 드리게 될지도 모른다.


"독실하다고는 할 수 없어요."


서로에 대해 아직 잘 모르던 시절, 종교적인 믿음에 대해 내가 물었을 때 그녀는 말했다. 어린 시절 삶에 지쳐있을 때 커다란 종교적 위로를 받은 뒤로 줄곧 교회를 다니고는 있지만 교회의 특정 면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일기도 해서 스스로를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녀의 그런 신중한 면도 참 좋았다. 성경에 나와 있는 말이니까, 목사님이 하는 말이니까 무조건 옳다는 식의 긍정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의심을 자신의 방식대로 고찰하여 분해하고 또다시 조립해 가는 과정을 반복하는 가운데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은 믿음 역시도 마찬가지로 해체했다가 다시 이어 붙였다가 하는 그녀의 분투에서 나는 또 하나의 철학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역사 속에서 신에 대한 믿음을 설파했던 많은 성자들 역시도 말한 적이 있다. 무지에서 비롯된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탐구와 논리로 믿음을 가지라고. 내가 삶 속에서 마땅히 철학해 나가는 방식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나의 진리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철저히 내면과 생각을 닫아놓은 채 다른 의견들을 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중첩에 따라 쌓여 가는 경험들에 대입해 가며 그 진리를 새롭게 수정해 나가는 방식. 그것이 내가 철학해 가는 방식이고, 그런 식으로 나만의 철학은 다듬어져 왔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그녀에게 반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철학에 반해 올해 4월부터 그녀와 만남을 시작하게 되었고, 일요일마다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영생불멸이라든가 예수의 부활이라든가 하는 일방적인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사람들 속에 파묻혀 그들과 똑같이 기도를 하기도 하고, 성경에 대한 목사님의 해석을 주의 깊게 들어가며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예수의 자취에 대해서도 차근차근 공부해 나가는 중이다. 설교가 끝난 뒤에 다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찬양가를 부르는 시간은 내가 손꼽아 기다리는 재미 가운데 하나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래, 그 모든 일들이 재미있다고 한다면 나름대로 재미가 있을 수 있는 일들이었다. 그래서 교회에서 사람들이 얻는 것은 뭘까, 이 믿음을 통해 삶 속에서 어떤 구원을 받으며 살아갈까, 현대에 예수가 살아 있었다면(아, 신이기 때문에 외려 살아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 되려나?) 이토록 많은 신자들이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스스로의 삶을 한 시간 이상 할애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그런 재미난 생각들을 떠올리기도 하며 그에 대한 해답을 어떻게든 끼워 맞춰 보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내가 이런저런 생각들로 재미를 채워가는 만큼, 다른 사람들도 종교를 통해, 교회를 통해 무엇이든 삶 속에서 채워가고 있는 것이겠거니.


살아가는 가운데 사랑하고 나누고 베풀고 용서하고 아끼라는 그의 메시지에는 적극 찬성하는 바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종교적인 입장에서 나 같은 사람에 대해 어떻게 판단을 내릴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감히 자신 있게 주장하지는 못하겠다. 다르게 생각해 보면, 내가 지금 그녀의 곁에 있지 않았더라면,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평생 동안 교회라는 공간에 발을 들일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지금 내가 교회에서 찾고 있는 것이라고는-앞선 문단에서처럼 이런저런 이유들을 덧붙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엔, 그저 그녀가 철학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그 시간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 즉 사랑일 뿐이니까. 하지만, 그 사랑 또한 하나님과 예수의 가르침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본다면, 저 하늘 어디에선가 절대자가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도 충분히 괜찮은 판단으로 교회를 들락거리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녀와 함께 보다 더 세련되고 멋진 답을 삶 속에서 말할 수 있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날이 오기까지, 신비주의든 합리주의든 어느 쪽으로든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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