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소설에 대한 이야기
이전에 작성했던 글쓰기에 관한 글과 어느 정도는 이어지지 싶다. 마찬가지로 글쓰기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는 함께 묶일 수 있지만, 이렇게 또 다른 글 한편으로 엮게 된 것은 엄연히 '소설'이라는 장르가 여느 글쓰기와는 다른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간단하게 다음과 같은 예시를 생각해 보면 내 말에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블로그나 자신만의 일기장에 일기를 쓴다거나 가끔씩 SNS에 하루에 하나씩 자신의 감상을 남기는 사람들 정도는 더러 찾아볼 수 있긴 하지만 소설을 쓴다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지 않았던가? 나 역시도, 지금껏 살아오면서 소설을 쓰는 사람과 이야기했던 적이라고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딱 한 번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입시 위주의 수업에 질릴 대로 질린 상태에서 이따금 도서관을 찾아 그 친구와 마주 앉아 각자의 소설을 써 내려갔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아버지가 작가였던 그 친구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대학생 시절부터 행정고시를 몇 년씩이나 준비하며 소설과 한참이나 동 떨어진 삶을 살아갔고, 지금은 5급 공무원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서 잘 먹고 잘 사는 중이다. 한때 소설가를 함께 꿈꾸었던 우리 둘은 그렇게 갈라졌다. 나는 서른이 넘어 이따금 소설을 끄적이는 백수가 되었고, 그 친구는 가정을 꾸린 번듯한 5급 공무원이 되었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라는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아무튼, 이 세상에 소설을 쓰며 살아가는 사람은 정말로 드물고(그럼에도 서점에는 어째서 그토록 저질스러운 서사의 소설들이 차고 넘치는지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 행위를 꾸준히 이어가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글쓰기와 마땅히 떨어져 있을 만하다는 생각이다.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내가 문학 소년이었던 그 시절, 그러니까 아직까지 미약한 내 영혼이 고등학교에 머물러 있던 그 시절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오직 좋은 성적만으로 학생들을 줄 세우기 바빴고, 좋은 대학이 곧 좋은 인생으로 연결된다는 말을 거드럭거리며 온종일 중얼대던 어른들에 둘러싸여 있던 그 시기로. 나는 결코 순종적이고 모범적인 아이로 자라나지 못했다. 집에서마저도 그런 식의 듣기 거북한 헛소리가 귀를 찔러 댔더라면 고등학생이던 나는 한참이나 더 비뚤어졌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부모님께서는 고등학교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참을성 있게 지켜봐 주셨다. 나는 사춘기 감성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상태로 나만의 흥미를 찾아 나섰고, 그 과정에서 몇 가지 꿈을 발견해 냈으며, 마침내 남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인생에서 앞으로 해 나가야 할 일에 대해 고심을 거듭하다가, 음악과 문학이라는 두 분야를 양손에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 음악은, 내가 지칠 때 마땅히 즐길 수 있는 수단으로만 남겨두게 되었고, 나머지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은 여전히 꼬옥 쥔 채로 꿋꿋이 나아가는 중이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남들보다 하고 싶은 일을 일찍이 발견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것은, 인생의 아름다움을 그곳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이상, 이하의 이유는 나로서는 도저히 생각해 낼 수가 없다. 아직 어린 고등학생이었던 나에게 지겹도록 한 길만을 강요하던 당시의 사회와 어른들의 고집으로부터 피신하여 몸을 숨겼던 학교 도서관 어느 구석에서 나는 생의 찬란함과 자유, 그리고 내 안에 꿈틀대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 시작 지점에는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있다. 로테를 향한 베르테르의 뜨거운 마음은, 아직 사랑을 제대로 경험해보지도 못한 나에게 엄청난 전율과 감동을 주었다. 나는 문학의 힘에 단번에 매료되었고, 나 역시도 그와 같은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기 시작했던 것이다. 문학은, 작가의 경험을 통해 독자들에게 직간접적인 경험과 감동을 주는 고결한 행위였다. 어린 나이의 내가 느꼈던 그 황홀한 교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내가 찾는 삶의 정수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 뒤로 나는 노트를 두 권 정도 구입하여, 한 권에는 빼곡히 소설을 써 나갔고, 다른 한 권에는 (매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감상을 남겼던) 일기를 차근차근 써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의 문학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여유를 찾는 방법에 헤매며 그런 활동들에 좀처럼 정진하지 못했었다. 펜을 잡았던 소년 시절의 감촉이 그리워 가끔씩 한가한 주말에 몇 번인가 노트를 꺼내 들어 끄적였던 게 전부였다. 그런 생활은 군대를 전역한 이후에 워킹홀리데이를 갔을 때에도, 이후에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을 때에도, 경찰 공무원이 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내 일상 속에서 주가 되어야 할 일들이 나아가는 길의 중심에 바로 세워지지 못한 채로 길가의 쓰레기나 먼지처럼 흩날리거나 쉽사리 손에 닿지 않는 곳으로 멀찍이 떨어져 있어 내내 답답한 마음이었다. 바쁜 삶 속에서 나름대로 자투리 시간을 마련하는 방법이라든가, 자유로이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을 알차게 쓰는 방법, 그리고 경제적 여유를 누리기 위한 나름의 공부를 거쳐오며 지금에 이를 수 있었다. 대단한 소설을 써내지 못했지만, 그 모든 시간들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이래저래 바쁘기는 했지만, 역시나 문학은 내 삶 곳곳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어린 시절의 괴테가 나에게 빅뱅과도 같은 존재였다면, 군시절 가운데 만났던 하루키는 나에게 태양-혹은 '우리 은하'라고 해야 할까-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주었다. 그의 솔직한 문체와 그가 펼치는 흥미로운 서사에 흠뻑 빠져 있던 와중에, 전역 이후 우연히 읽게 된 그의 에세이를 통해서 다시 한번 작가의 길로 나아가겠다는 열망을 불태우기도 했다. 내 생에 결코 없으리라 여겼던 대학 진학이라는 선택 역시도 하루키가 남겼던 에세이가 동기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작가로서 고졸이라는 이력을 책의 표지 뒷면에 써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조금은 쪽팔리다는 생각을 했었다고(지금은 전혀 개의치 않는 부분이다). 1년간의 대학 생활을 경험하면서, 대학이란 공간이 결코 졸업 이력을 남길 만큼의 가치가 있는 곳이 아니라는 판단 하에 자퇴를 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자의로 결정했더라면 가지 않았을 확률이 한참이나 더 높았던 대학이라는 특별한 공간을 한 번 경험해 봤다는 면에서, 향후 작가가 되어 여러 이야기를 풀어가게 될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 백수가 된 이 시기에 이르러, 나는 소설을 써 내려갈 만한 최적의 시기와 환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블로그 글쓰기를 통해 글을 쓰고 다듬는 데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지금까지 시간적 여유가 없어 차일피일 미루면서 묵혀두기만 했던 소설적 감상들을 한껏 늘어놓아도 나에게는 그 누구도 제약하지 않는 나만의 시간이 온전히 남아 있으니 말이다. 마침내 나는 그토록 갈증을 느껴왔던 문학적 열망을 온통 쏟아내기에 이르렀다-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게으름이 덕지덕지 들러붙어 나를 방해하기는 했지만. 줄곧 하루키가 서른의 나이에 데뷔했던 것을 염두에 두며, 나 역시도 마찬가지로 서른에 접어들었을 때 소설 한 편을 완성시키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스스로의 부족함으로 인해 그 시기로부터는 조금 늦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써 나간 끝에 작년 5월부터 본격적으로 집필해 왔던 작품을 12월에 접어들어 한 편의 초안을 완성시킬 수가 있었다. 나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장편 소설이다. 아직까지 여러 차례의 퇴고를 거쳐야 하는 조악한 수준의 작품이기는 하지만, 평생토록 원했던 일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원고라고 할 수 있다. 잘 다듬은 뒤에는 공모전이나 문학상에 출품해 볼 생각이다. 그 결과에 상관없이 나는 또 다른 이야기를 계속적으로 이어갈 테지만, 첫 단추를 훌륭히 꿰어낸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또 없겠지?
앞으로도 문학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갈 생각이다. 가끔 거센 바람에 휘청거리고, 때때로 걷는다기보다는 기어가는 수준으로 나아갈지도, 가끔은 지쳐서 쓰러진 채 한참이나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쉬어갈지도 모르겠지만, 걷고 또 걸으며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는 삶을 살아 내야지. 마땅한 결과가 당장에는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계속해서 한 우물만 파다 보면 운 좋게 어느 수맥을 건드려 제대로 된 우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란 사실을, 아주 적은 확률이라 할지라도 나는 믿는다.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들 가운데 지극히 감사한 사실(혹은 현상, 현실)이 하나 있다면, 생각보다 우리 삶에는 많은 행운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이 문학이라는 우물을 파는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 즐거우니, 내 입장에서는 기꺼이 삽을 들지 않을 이유가 없다.
먼 훗날에도 누군가 나를 바라보며, 혹은 현재의 내-그 시점에 이르면 과거의 내가 되겠지만-가 미래의 나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면, 그런 미래가 나의 현실이 되어 펼쳐지고 있다면 참 기분이 좋을 것 같다. 어쩌면 단순히 누군가로부터 이런 말을 듣기 위해서 계속해서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미래가 진정 내 삶 속에서 펼쳐질 수 있도록, 쓰고 쓰고 또 쓰며 열심히 정진해 봐야지.
어라? 저 녀석...
아직도 여전히-
소설 쓰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