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낯선 환경에 처할 수 있다
대부분의 누군가에게 '전학'이라는 것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이 겪는 일일 것이다. 기억 속에서 '우와, 전학생이다' 정도로 정리될 수 있을만한 단어. 대체로 겪을 일이 없으니, 감히 '내가 그 전학생이었다면'과 같은 상상은 지난날을 통틀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 글이 그런 사람들에게 꽤 괜찮은 간접 경험이 되었으면 한다. 나는 10살 남짓한 어린 나이에 '전학'이라는 것을 경험해야 했다. 스스로 원한 적도 없고, 전학 당일까지도 감히 내가 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해야만 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전라남도 목포. 그곳이 나의 첫 전학지였다. 나는 경상남도토박이, 내 눈앞의 아이들은 전라남도토박이. 나는 초등학교 4학년 2학기 겨울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자투리 기간에 전학을 갔었다. 그런 기간이어서였는지, 아니면 선생님이 별 관심이 없던 것이었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어린 나에게 내가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더 나은 기억 정도는 얼마든지 심어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안다. 전학생인 나를 교실로 안내한 선생님은 마땅한 자리가 없다고 투덜대면서 책상과 의자를 어디선가 가져와 교탁 옆에 나란히 붙이며 말했다.
"너는 여기 앉으렴."
나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았고, 그 뒤로 선생님에게서 말끔히 잊혔다. 변변한 자기소개의 시간조차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내가 나서서 소개한다고 해야 하나,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왠지 눈에 띄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뒀다. 교탁 옆자리는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심지어 칠판이 있는 쪽과는 반대로 책상이 놓여있어, 40여 명의 시선을 계속해서 느껴야 하는 심히 불편한 상황이었다. 나는 하교하는 순간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선생조차도 외면한 나라는 존재에게 아이들은 좀처럼 말을 걸지 않았고, 지나가다 툭툭 내뱉는 전라도 사투리는 왠지 모르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이 상태로 일주일만 지내면 5학년이 되어 새 학기가 시작된다는 사실과 학기 끝무렵이라 점심시간 이전에 학교에서의 일과가 마무리된다는 점이었다. 수업시간이면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내용으로 선생님과 아이들은 소통했고, 나는 40여 명의 시선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교실 뒤편의 사물함을 계속해서 응시할 뿐이었다.
이틀째가 되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나는 여전히 교실에서 모두에게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는 것도 지겨워서 1교시가 끝나고 교실 한편에 있던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가져와 수업 시간에 읽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런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나를 제외한 이들은 여전히 서로 소통하며 그들이 하던 과업을 진행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더욱더 독서에 빠져들었다. 너희들이 날 무시한 만큼 나도 너희들을 무시하겠다, 하는 마음으로. 나는 그 교실에서 오로지 독서라는 행위만이 나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듯이 눈으로 글자를 따라 읽고, 책장을 넘기는 행위를 반복했다. 한 권을 다 읽으면 책장에 꽂혀 있던 다른 책을 가져와 읽었다. 책장에는 30여 권의 책들이 꽂혀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도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에 읽어나갈 책들이 소진될 일은 없었다.
처음 수업 시간 중에 책을 다 읽었을 때에는 다음 쉬는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책장에서 새 책을 가져오는 조심성을 보였지만, 몇 번째부터인가는 그들의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수업시간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책장까지 왕래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래도 너네들 나 무시할 거야? 한편으로는 그런 마음이었다. 그러다 3일째, 혹은 4일째 되던 날에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어 그런 나의 행동에 대해 선생님에게 항의를 했다. 왜 저 아이는 책만 읽나요? 나는 당황했지만, 드디어 나의 존재를 알아챈 그 아이에게 약간의 고마움을 느꼈다. 이 교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 넌 내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었구나. 왠지 한쪽 가슴이 찡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뒤이은 선생의 대답이 순식간에 내 마음을 얼려버렸다.
"쟤는 신경 쓰지 마. 내버려 둬."
언제 꺼내어봐도 이 기억은 참 몹쓸 기억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선생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그럴 수 있었을까. 나는 머리가 띵했지만, 책 속의 글자들을 계속해서 쫓아갔다. 쫓아가야만 했다.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다는 듯, 마치 거기에 나는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라는 듯이 계속해서 읽어나갈 뿐이었다. 내 기억에 그 일주일 동안 읽어나간 책이 다섯 권 정도였지만,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내 눈은 철저히 글자를 쫓았지만, 내 머리는 어느 것 하나 남겨놓지 못했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은 무서울 정도로 잔잔하고 차가웠던 그 공간의 공기뿐이다.
다행히도 이런 위기 속에서도 나는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내가 무언가 잘못을 했거나 못된 아이여서 그들이 나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그들이 다수의 힘으로 멀쩡했던 나를 무시했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어린 나는 멀쩡히 눈이 두 개가 박혀있는 사람이었고, 오히려 그들이 눈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그들에 동화되어 내 눈 한쪽을 도려내지 않을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우리는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수라는 힘으로 무장하여 멀쩡한 사람을 몰아세우고 상처 준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여전히 그러지 않기 위해 그날의 씁쓸했던 기억을 곱씹으며 생각한다. 언제 어디에서든 같은 일은 일어날 수 있고, 그 반대의 상황도 벌어질 수 있다고. 나 자신을 지키면서, 동시에 다른 누군가를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함부로 탄압하지는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