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부사관의 고충
어릴 때에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헤쳐나갈 수 있어 보이는 어른이라는 지위를 동경했었다. 원하는 만큼의 자유와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누리는 모습들은 언제나 부러움으로 다가왔었다. 하지만 막상 어른이 된 뒤로는 자유에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책임하게 인생에 대해 아무렇게나 지껄이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경험을 쌓으며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나름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어떠한 책임도 내가 원한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내게 주었다. 내가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막 실무 부대에 발령을 받아 갔을 당시는 정확히 어른과 어린이의 경계가 되는 지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시기는 어른이 되기에는 조금 모자랐고, 그렇다고 마냥 어리광을 피우며 어린이로 남아있을 수는 없었던, 그런 시기였다. 홀로 서기를 조금이라도 주저하면 그대로 주저앉아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 당시 내 주위를 계속해서 맴돌았었다.
2012년 7월, 나는 해병 2사단 전차대대에서 군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부대를 통틀어 가장 어린 나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두 명의 기갑병과 동기들과 함께 부임했다. 신임 훈련소가 아닌 실제 부대에 대한 내 첫 이미지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공포', 혹은 '두려움'이었다. 당시 부대 내 건물들이 리모델링 중이어서 연병장에 컨테이너박스들이 즐비해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전쟁에서 패한 병사들이 아무렇게나 세워진 병영에서 지내는 모습을 상기하게 했다. 그런 컨테이너에서 슬금슬금 기어 다니는 병사들, 그리고 간부들은 어딘지 모르게 무서운 분위기를 풍겼다. 중간중간 마주치는 부사관 선배들의 영문 모를 시비들에 간간이 대처해 나가며 우리들은 낡디 낡은 컨테이너 박스들을 오가며 주임원사, 대대장, 중대장에게 인사를 다녔다. 동기 중 한 명은 나와 동갑이었고, 한 명은 나보다 세 살 연상의 형이었다. 훈련단에 있을 때에는 접점이 없어 친해지지 못했었지만, 우리들은 비슷한 처지에 단기간 함께하며 급속도로 친해질 수 있었다.
친밀함을 제대로 맛보고 즐기기도 전에, 병과의 차이로 인해 전차대대 내에서도 나는 본부중대, 그리고 두 동기는 각각 다른 전투 중대로 배정을 받아 떠나게 되었다. 서로가 옆 건물에서 생활하게 될 뿐이었지만 왠지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우리는 잘 적응하여 영외로 나가서 함께 술 한잔하자는 약속을 하며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우리들은 간부였지만, 부대 적응을 위해 일정 기간을 영내에서 생활해야 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당시에는 4개월 정도였을 것이다. 영내에 별도로 간부숙소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 병사들과 함께 생활반에서 지내야만 했다. 문제가 발생하려야 발생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셈이다. 그토록 험난한 곳에 동기들과도 떨어져 홀로 남겨져야 한다는 사실은 나에게 더욱더 큰 공포로 다가왔다.
총 7명의 보급병과 조리병이 생활 중인 생활반에 배정받았다. 함께 과업을 해나가야 하기 때문에 편의상 그런 식으로 배정한 것이다. 가장 나이가 많은 보급병은 열아홉 살인 나와 다섯 살 차이가 나는 24살이었다. 그 밑으로는 내 위로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계급은 가장 높지만, 나이는 가장 아래에 위치한 모순 속에서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나가야만 했다. 이미 훈련단 생활반에서 한번 겪어보기는 했지만, 상황은 많이 달랐다. 그때는 모두가 동기들이었고, 눈앞에 닥친 영내 생활에서는 서로가 불편할 수밖에 없는 병과 간부의 관계였으니 말이다.
우리의 주적은 간부이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대로 내려오는 해병 병사들끼리의 인계 사항이었다(아마 아직도 있겠지). '우리의 주적은 북한군이다'라는 군대의 표어를 모방한 것으로, 그들만의 병영 문화를 만들어가는 데에 있어서 간부들은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지속적으로 병들끼리 인계하고 있는 듯했다. 당시에는 2011년도에 발생했던 강화도 해병대 총기 난사 사건 이후였어서, 해병대 전 부대들이 병영문화 혁신을 표방하며 해병대 특유의 기수제에서 발생하는 여러 호봉제라든가, 기수 열외와도 같은 따돌림 문화를 없애는 데에 적극적인 때였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내하사 시절부터 전역을 할 때까지도 여러 잔재들은 여전히 남아있긴 했었다. 그래도 다행인 사실은, 내가 영내하사 생활을 했던 때에 큰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름 간부가 섞여있어서 행동거지를 조심했는지, 아니면 크게 보았을 때의 악습들이 모두 없어진 뒤여서였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영내 생활을 할 당시, 이전까지 쌓아왔던 걱정만큼 생활 자체가 힘들지는 않았다. 고된 훈련을 받았다고는 하나 여전히 허약한 체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때라, 병사들이 만만하게 보고 덤벼들면 어떡하나 하는 고민들을 안고 부대에 갔던 나였다. 다행히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에서 계급은 깡패가 맞았다. 영내에서 병사들은 내가 지날 때마다 경례를 해주었고, 용건이 있어 나를 찾을 때에는 깍듯하게 내 이름 뒤에 '하사님'을 붙여주었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말 못 할 감사함을 느꼈다. 아직 군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그들보다 업무능력이 한참이나 떨어지는 나에게 그런 존중을 보여주다니(물론 계급 문화 덕분이겠지만). 그런 초기의 경험들은 나중에 군생활에 익숙해지고 적응을 완벽히 마친 뒤에도 병사들에게는 늘 애정을 품고 대해줘야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게 했다. 실제로 그 뒤에도 매달 내 월급의 1/3 이상을 함께 업무 하는 병사들의 간식과 식사 비용으로 지불할 정도로 나는 병사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런 덕을 쌓은 덕분에 아직까지도 꾸준히 연락을 이어오는 병사들이 있다. 사회에 나온 뒤로는 당연히 형이라고 부르며 잘 얻어먹고 다니는 중. 간부는 적이라는 그들의 인계사항은, 계급적인 차이로 인해 간부들과 사람 대 사람으로서 대면할 수 없어서 그들 나름대로 세운 방비책이 아닐까 하는 동정 가득한 마음까지도 생겨났다. 언제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인간적인 대우를 베풀면 다 돌아오기 마련이라는 하나의 진리와도 같은 것을, 나는 계급과 문화들이 뒤섞여 모순이 가득했던 군대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시에 읽었던 데일 카네기가 저술한 <인간관계론>은 그런 깨달음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영내 생활 당시에 사이버지식정보방(일명 싸지방) 한편에 마련되어 있던 부대 도서들 가운데 이 책을 집어와서 밤에 잠못들 때마다 꺼내어 읽어 내려가곤 했었다. 워낙 오래전에 완독 했던 책이라 자세한 내용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분명 인간관계에 있어서 많은 것들을 담아놓은 책이었다. 항상 진심을 다하고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절대로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에 흔들려 눈앞의 사람들을 대해서는 안 된다는 귀중한 메시지들로 기억하고 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써 손색이 없는 책이라고, 감탄을 하며 읽어내려갔었다. 영내 생활 때 읽었던 이 책 덕분에 이후의 군생활은 물론이고 이후의 삶에서도 관계를 대하는 데에 남들보다 조금은 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철학자가 꿈이었던 소년은 어느새 어엿한 군인이 되었고, 철저히 자유를 빼앗긴 상황 속에서도 복잡한 사고들을 바탕으로 인생이라는 꽃을 피워나갔다. 삶에 대한 고민,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들은 나를 또다시 철학이라는 해답지를 펼쳐 들게 했다. 영외 생활에 접어들었을 때에도 지치고 힘들 때면 관련 책들을 꺼내서 읽고, 인생에 대한 감상들을 글로 풀어나가기도 했었다. 집안에 틀어박혀 공상만으로 채웠다면 절대로 해나갈 수 없었을 고민과 사색들로 인생을 계속해서 채워나갔다. 인생의 수많은 고통들을 온몸으로 맞서며, 나는 더욱더 단단해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