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 가까스로 내디딘 첫 발

좀처럼 친절을 베풀지 않았던 사회, 아니 군대

by 봉필


병사로서 군생활을 해나간 적은 없어서 간부와 병사의 생활에 대해 감히 확신에 찬 상태로 비교할 수는 없으나, 과업을 진행할 때의 무게감만큼은 서로 간에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는 것만이 목적인 병사들과는 달리, 나에게는 하루 과업에 있어서 나름의 임무와 목표가 분명한 편이었다. 국가에서 쥐어주는 금액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던 만큼, 더 큰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스스로 수없이 되뇌었더랬다. 당시에는 병사들의 급여가 지금과 같이 개선되기 전이어서 병장 월급이 13만 원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고. 그에 비하면 내 월급은 열 배 이상이 되는 금액이었으니, 업무에 있어서도 열 배 이상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루 과업에 임했었다.


처음 나에게 업무를 가르쳐주었던 담당관은 해병 2사단 전체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무능력한 사람이었다. 곧장 직진으로 걸어 나가면 되는 길을 굳이 이리 꼬고 저리 꼬아서 최대한 빙 둘러가는 말도 안 되는 업무 스타일을 고수하는 꽉 막힌 사람. 그렇게 내가 사회에서 처음으로 만났던 직장 상사는 안타깝게도 가장 최악의 직장 상사로 기억에 새겨야 했다.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어린 나조차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의 일처리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진즉에 알아차릴 정도였으니, 그의 업무 수준에 대해서는 굳이 별도의 수식어들로 표현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전차대대? 어휴 고생이 많네."


보급수송대대에 물자를 받으러 가는 등의 업무를 처리하는 중에 내 소속을 밝힐 때면, 타 부대 담당관들과 각종 부서 담당자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이야기만을 뱉어댔다. 담당관 때문에 고생이 많다고. 이 악물고 업무에 관하여 숙달한 이후에 돌아보니, 정말 미련한 방식으로 업무를 처리하도록 고문 수준으로 강요받았었다는 사실마저 깨달을 수 있었다. 간단한 업무마저 혼자 바쁜 척 허둥지둥 대다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가 하면, 괜히 옆에 있던 나를 나무라거나, 성실히 맡은 바를 해나가고 있던 보급병들에게 화를 내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다시금 떠올려보아도, '최악'이라는 수식어는 결코 아무에게나 붙일 수 없는 성질의 단어라는 사실을 상기할 뿐이다.


보급병과는 병과 특성상 식당이라는 장소와 조리병들까지도 관리감독을 해야 했는데, 영내 하사 시절에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식당과 사무실을 오가며 그 모든 업무를 도맡아 했었다. 업무적인 차원에서 조리병과 보급병의 과업을 모두 이해한 상태로 일을 배워 나가야 한다는 담당관의 표면적인 이유가 있기는 했으나, 사실 그런 것들은 자신이 영내 하사 시절에 겪었던 것을 당연하게 후배에게도 전가하려는 생각에서 비롯된 비루하기 짝이 없는 편협한 사고로부터 나온 지시였을 뿐이다. 나의 일과를 보며 건강을 염려한 본부 중대장의 꾸짖음에, 보급 담당관은 다음과 같이 당당히 말하기도 했다. "저 영내하사 때는 다 이렇게 했습니다. "


새벽 네 시 정도에 일어나 조리병들과 함께 부대원들의 아침 식사 준비를 함께하고, 오전 9시부터는 본격적인 보급 업무를 해나갔다. 모든 과업이 종료되는 오후 6시가 넘어가서도 나는 각종 업무에 대해서 공부하는 시간으로 오후 10시까지는 무조건적으로 잔업을 해야 했다. 절대적으로 잠이 부족했었던 지옥과도 같은 나날들이었지만, 완벽히 배워 당시 담당관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업무 능력을 끌어올려야겠다는 심산으로 싫은 소리 한마디 안 하고 꿋꿋이 이겨냈던 나날들이었다.


다행히도(?) 내가 업무를 완벽히 배우기 전에 그 담당관은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가게 되었다. 이후에 온 담당관 역시도 보급병과 사람들 사이에서 심각한 아웃사이더이기는 했었지만, 내가 업무를 해나가는 데에 있어 약간의 편의를 줬다는 측면에서 이전 담당관에 비해 조금 더 나은 수준이었다. 부대에 부임하여 1년 정도가 지날 무렵, 나는 웬만한 부대 보급담당관들이 할 수 있는 업무들을 전반적으로 익혀낼 수 있었다. 그런 업무 능력이 생기고 난 후에 우선적으로 했던 것이, 무능력한 담당관으로 인해 보급병들에게 과중되어 있던 업무를 모두 내가 가져와 도맡아 해 나간 것이었다. 업무를 파악하고 보니 보급병들이 계속해서 해나가고 있는 일들이, 일개 병사들이 책임져가며 할 만한 무게의 업무들이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도대체 군대라는 곳은 어떻게 이딴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 걸까. 늘 그런 의문들과 함께였던 초임 하사 시절이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간부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받아가는 월급 정도의 일들도 하지 않으려 하고, 계급이 낮다는 이유로 의무 복무를 하고 있던 병사들에게 그 업무를 전가하는 일이 허다했었다. 나는, 그런 못난 간부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사회에서 첫발을 내디뎠던 군대에서의 경험이 그러했던 탓인지, 오랜 세월 한 조직에 머물렀음에도 무능력한 사람에 대해서 자연히 '경멸'과도 같은 감정을 품게 되었다. 업무적으로 충분히 시간을 주었으나, 원하는 만큼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조금은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기도 했었다. 과하다고 할 정도의 수준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녹록지 않은 사회의 고난들을 온몸으로 이겨낸 끝에 세상을 그토록 안일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견딜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나 군대에서의 업무는 단순한 반복들일뿐인데, 기본적인 업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해가 잘 가지 않기도 했었다. 지금은 그런 사람들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을 한층 더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런 군생활 와중에 오랜 세월 비슷한 업무의 반복을 헤쳐나가며 나를 길러내 준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경외심도 생겨났다. 어느덧 영외하사가 되어 출퇴근을 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과중한 업무로 인해 밤 9시가 넘어서 퇴근해야 했던 나날들 중 어느 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던 적이 있다.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요."


나름대로 떠맡은 인생의 업무들을 처리해 나가며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회를 헤쳐나가는 것은, 자신의 몸집보다도 한참이나 큰 바위를 산 정상으로 계속해서 굴려 올리는 시지프스의 형벌과도 같은 성질의 것이었다. 마침내 산 꼭대기에 올렸다 싶을 때, 날카로운 정상의 뾰족함으로 인해 바위는 다시 바닥 끝으로 굴러 떨어져 버린다. 그리고, 묵묵히 그 바위를 다시 굴려 올리기 위해 발걸음을 옮겨야만 하는 인생. 아버지, 어머니는 그런 인생을 무던히 견디며 나라는 나약한 생명을 길러낸 것이었다. 어엿한 사회인으로서 모진 풍파를 모두 받아낸 아버지와의 전화는, 별 시답잖은 대화들이 오고 갈 뿐이었지만 그 자체로 나에게 커다란 위안을 가져다주었다. 이토록 어려운 사회생활이라는 고통스러운 과업을 어머니와 아버지는 대체 무슨 힘으로 이어나갈 수 있었던 걸까. 나는 이것을 평생 해나갈 수 있을까. 애초에 이 길의 어디쯤에서 다른 방식의 길로 뛰어들 수 있는 기회라도 있기는 할까. 군에 입대하는 순간부터 군생활을 계속해나갈 생각이 없기는 했지만, 이런 부조리한 시스템 속에서 도저히 평생을 살아갈 수는 없겠다는 생각들을 더해가며 하루라는 이름의 바위를 묵묵히 산 꼭대기에 굴려갈 뿐이었다. 그 과업이 군대라는 울타리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역시도, 어렴풋이 짐작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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