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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필 Oct 31. 2024

사랑에 눈을 뜨다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품을 수 있었던 애틋한 마음


앞으로 내가 즐길 인생에 대한 생각으로 채워나갔던 지난날들을 뒤로하고, 심각하게 자유를 박탈당한 상황에 처하자 막연하게만 떠올리곤 했던 또 하나의 인생 과제를 좀 더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이름은 바로 '사랑'. 사랑을 빼놓고 내 인생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다는 윤동주 시인의 마음에 일찍이 감복한 바, 나는 인생에서 마주했던 모든 대상들에 열정과 사랑을 들이붓는 것을 주저하지 않아 왔다. 당연하게도 젊고 혈기왕성했던 나에게 '이성(異姓)'은 그 대상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끌림이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사랑에 대해 감히 탐구해보지 않았었다. 음울하기 짝이 없었던 사춘기 시절을 홀로 견뎌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혹은 좀처럼 또래 이성에게는 큰 관심이 생겨나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늘 메말라있었지만, 더 큰 인생에 대한 고민들 앞에서 사랑에 대한 감정을 비교적 잘 억눌러왔다. 그래서 나의 학창 시절에서는 잠시 진심을 담아 흠모했었던 '소녀시대'에 대한 추억 말고는 좀처럼 사랑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잠깐씩 가볍게 떠갔던 또래들에 대한 마음을 사랑으로 정의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떠올랐는지도 모를 만큼 붕- 하고 떴다가 나도 모르게 사뿐히 다시 가라앉을 뿐이었으니 말이다. 


진정한 사랑에 대한 열망은 살면서 가장 자유를 억압받았던 영내 하사 시절에 강력하게 불타올랐다. 지금껏 또래 이성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것을 가슴 깊이 후회하면서 지금부터라도 실제로 이성에 대한 사랑을 겪어나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굳혀나갔다. 그렇게 불꽃처럼 솟구치는 마음을 바탕으로 지독하게 서툴렀던 첫 연애를 시작할 수 있었다. 


상대는 놀랍게도 목포에서 초등학교 5학년 시절에 같은 반에서 생활했었던 또래 친구였다. 거의 10년 가까이 흐른 시점에서 도대체 어디에 물어 그 친구의 연락처를 얻어냈는지까지는 자세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아무튼 간절한 마음이 이어져 그녀와 닿을 수 있었다. 그녀는 연락했을 당시 부산에서 피부관리 일을 하고 있었다. 사실 초등학교 시절에 서로가 친하게 지냈다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었고, 애틋하게 무언가를 떠올릴 정도로 간질간질한 어떠한 추억도 서로에게는 없었다. 그저 간절하게 연애가 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나를 기억하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그녀에게 연락을 했을 뿐이었다. 과연, 진심은 통한다고 했던가. 나는 그녀와 첫 연애를 시작할 수 있었다. 


사랑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도 민망한 것이었지만, 나는 분명 사랑에 빠지면 느낄 수 있는 것들을 감각적으로 처음 접할 수 있었다. 그 속에서 이전에는 없던 소용돌이가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서툴렀던 그 풋사랑(내 첫사랑은 따로 있다)은 풋풋한 마음만큼이나 풋풋하게 사그라들어 소리 없이 흔적을 감추었다. 그렇지만, 혹독한 환경 속에서 그토록 불타오르는 감정은 확실히 삶의 의지를 끌어올려주었다. 나는 비록 어설픈 마음이었지만 어느 정도 어렴풋하게나마 여러 감상들을 남길 수가 있었다. 인생은 사랑을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사랑은,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감정들 가운데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우며 또 동시에 애달픈 것이라고. 


사랑은 언제나 고달픈 인생이라는 방황길을 한층 더 복잡하게 꼬아버린다. 그러면서도 고달프기만 한 길에 꽃을 피우기도 하고, 때때로 비를 내려주기도 하며 인생을 한층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언제나 방황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이 분명하다. 예측 불가능하고, 때때로 좌절하게 만들었다가 또 어느 날은 방긋 웃게 만든다. 이 마약과도 같은 중독성은 분명 삶을 훨씬 더 즐기며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분명하다. 


오직 간절한 마음 하나로 그렇게 사랑의 맛을 본 나는 뒤이어 다른 사람들과의 연애를 꾸준히 이어올 수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마다 깊이 관계를 갖는 것은 나의 삶을 더없이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그런 상황들 속에서 당당히 서 있을 수 있을만한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풍부한 감상과 감정들을 안겨줬다는 사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언제나 사랑은 내 곁에 머무르며 끊임없이 인생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나는 보다 확신에 찬 상태로 많은 일들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고단했던 군생활을 버티는 데에 사랑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일 것이다. 언제나 나에게 활력과 벅찬 감정을 안겨주는 사랑을 놓아버리는 행위는 좀처럼 내 인생에서 상상하기 힘든 일이 되어버렸다.


요즘 비출산, 비혼, 거기에 이어져 비연애까지 부정적인 말들을 세간에 떠도는 것을 안다. 심히 개탄스러우면서 염려스럽다. 대체 사랑을 하지 않는다면, 어떤 인생을 살아갈 셈인가. 그 부정의 단어들을 함부로 뱉고 다니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인생이라는 방황길에서 사랑은 복잡다단하고 더없이 광막한 감정들을 던져대지만, 원래 그렇게 흔들리며 나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뜨겁게 깨닫도록 한다. 사랑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인생에서 그 어떠한 것도 일구어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아닌 특정 대상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단 한 번도 품어보지 못한 사람은, 진정 간절하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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