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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필 Oct 26. 2024

빨간 명찰, 그리고 닥쳐오는 고민들

열아홉 살에 해병대 하사가 된 이야기


해병대를 나온 사람이라면 빨간 명찰을 단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천자봉 등반을 이루어내고, 극기주를 무사히 버틴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빨간 명찰 수여의 순간. 해병대에 몸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자랑스러운 순간을 아주 멋지게 기억에 새겨놓았을 것이다. 그와 달리, 나는 아주 조금은 다른 감상으로 그 기억을 새겨 넣었다. 천자봉 등반 과정에서, 본 행렬과는 상당히 뒤처진 상태로 뒤늦게 올라 찝찝했을뿐더러, 부대로 복귀하는 길에 다리 쪽 부상을 입어 완전군장을 메고 돌아오지 못했었기 때문에, 스스로가 그렇게까지 자랑스럽지는 않았다(창피한 마음에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도 당시에는 말을 못 했었다). 나에게 명찰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에 더해, 임관한 뒤에 닥쳐올 군생활에 대한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 차 마냥 기쁨에 젖어있을 수가 없었다. 빨간 명찰을 받았으니 이제 임관은 거의 따놓은 당상이었지만, 실제 군부대에 가면 나는 병사들보다도 나이가 한참이나 어린 부사관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느새 성인이 될 수는 있었지만, 어린 나이, 그리고 어린 마음에 또다시 험악한 환경에 내던져져야 한다는 현실에서는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임관 이후에 5주간의 추가 훈련으로 공수와 유격 훈련을 받을 때까지도 나의 고민들은 여전히 머릿속을 맴돌았다. 간부라는 직책으로 병사들을 이끌어야 한다. 우습게 보이면 안 되지만, 또 너무 지나치게 권위적으로 나선다면 오히려 어린놈이 나댄다며 나를 따르지 않을 것이 뻔했다. 사실 두 살 위인 친형의 친구들도 어려웠는데, 그 이상의 사람들(하지만 나보다 하급자)에게는 대체 어떤 방식으로 다가가야 맞는 것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생활반 동기들도 거기에 대해 고민하는 내 모습을 보며 몇 날 며칠을 놀려대곤 했다. 사실, 그런 고민들은 막상 눈앞에 현실로 펼쳐지기 전까지는 좀처럼 해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임이 분명했다. 


123만 원.


훈련단에서 공수교육을 받고 있던 당시 내가 수령한 월급 액수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사회에서 받은 정식 월급. 일부러 잊지 말라고 쉬운 숫자들의 배열로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솔직히 당시만 해도 사회에 아무런 공헌도 하지 않고 배불리 먹고 열심히 체력 단련하고 훈련을 받은 게 다인데 국가로부터 돈을 지급받고 있다는 생각에 왠지 떨떠름한 감정이었다. 그래도, 마음 한편으로는 나도 어엿한 사회의 일원이 된듯한 소속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여 처음 받게 된 그 돈은 이전까지 만져보지 못했던 큰돈이었다. 어머니는 적금을 드는 것이 좋겠다고 했고, 나는 그 말에 따랐다. 좀처럼 인생에 있어서 후회를 남기지 않는 나도, 가끔 그날을 회상하며 생각하곤 한다. 그때 테슬라 주식을 샀었더라면...


추가적으로 실시되었던 공수와 유격 훈련은 상당히 고되었지만, 극기주 때의 과오를 생각하며 다졌던 각오 덕분에 무사히, 그리고 완벽하게 모든 훈련들을 이겨낼 수 있었다. 꽤나 힘들었던 훈련을 마친 뒤였지만, 너무 힘들어서였을까? 딱히 특별하게 기억될 만한 것들은 없었다. 그럼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훈련을 꼽으라고 하면 역시 공수 훈련일 것이다. 실제로 꽤 높은 상공(몇 미터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을 비행 중인 헬기에서 낙하산을 멘 채 강하를 실시하는 것을 목표로 훈련을 해나간 것이었는데, 훈련을 시작하기 전에는 막연한 두려움이 앞섰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상에서 수없이 착지 동작을 연마하고, 11미터 높이의 막타워에서 뛰어내리는 훈련들을 무한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얼른 헬기에서 강하하고 지긋지긋한 훈련을 끝내버리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차게 되었다. 그것이 고된 훈련 반복의 효과라고 할 수 있겠지. 그래서 막상 강하를 실시하는 날에는 그 어떤 떨림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아, 드디어 이 고된 훈련이 막을 내리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헬기에서 뛰어내렸을 뿐이었다. 처음 강하 때 착지를 실수해서 발바닥에 500원짜리 동전만 한 물집이 잡히기는 했지만 말이다. 


해병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해병대에 입대해서 들었던 문구들 중에 가장 멋지다는 생각이 들게 한 문구이다. 마침 입대할 때 연약하고 어리기도 했던 나에게는 훈련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이 되어준 문구이기도 하다. 정말 멋지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나 스스로가 이 문구를 증명해 낸 셈이기도 했다. 입대 전날, 훈련을 버텨내지 못하고 퇴소할 것이라고 아버지가 장담했을 정도로 약한 체구와 체력을 지녔던 내가 단 16주 만에 어엿한 해병대 부사관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확실히 해병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 분명하다고, 나는 스스로의 경험으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난 시점에서 이 문구에서의 '해병'은 '사람'으로도 치환할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말했다. 오직 인간만이,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사람은 어떤 한 가지 목적이나 목표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어떤 목적이나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고 그렇게 의도한 방향으로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책의 내용으로만 접했더라면 이해하는 것이 늦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그런 경험들을 앞서 겪어보았기 때문에 그런 인생의 성질들을 받아들이는 데에 한결 수월할 수 있었다. 스스로가 변화하고자 마음먹고 그 변화에 필요한 고통 앞에서 주저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얼마든지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아주 일찍이 깨달은 셈이다.


나는 어느덧 포항에서의 훈련을 모두 마무리 짓고, 배치받은 부대로 떠나야만 했다. 꽃봉(해병대에서 의류대를 일컫는 말)에 훈련을 받으며 한 껏 늘어난 짐들을 모두 욱여넣었다. 잔뜩 부푼 꽃봉을 둘러메고, 지금은 모두 연락이 끊겨버린 동기들과 간단하게 작별 인사를 나눈 뒤 교육훈련단을 나섰다. 훈련이 끝나고 약간의 휴가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시흥 집으로 가기 위해 포항역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기분이 이상했다. 16주간 동고동락했던 동기들과 떨어져 또다시 낯선 환경이라니. 하늘은 무심하게도 맑았다. 차창 밖의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내 인생은 떠가는 구름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언제나 낯선 위치에서 또다시 낯선 위치로 옮겨가듯, 낯선 환경들과 조우해야만 하는 지독한 저주에라도 걸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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