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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필 Oct 24. 2024

체력적 한계, 그 속에 피어났던 것들

결국 나를 죽이지 못했던 고통들


엄격한 규율과 규칙 속에 갇혀 청춘의 나날들이 물 새듯 흘러가고 있었지만, 나는 그리 좌절하지 않았다. 군대라고는 해도 어차피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니 어느 정도의 희망 정도는 안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생각 이상의 무거운 분위기는 다행히도 닥쳐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가 지날 때마다 달력에 큰 X 자를 표시하는 기쁨이 그 어떤 것보다 큰 것이었다고 말하면 조금은 안쓰럽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진심으로 그 행위를 즐기는 자들을 마냥 동정의 시선으로만 바라볼 수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 하루도 무사히 이겨냈다는 거창하고도 신성한 하나의 의식이었으니까. 


나이순이었던 임시 교번을 떼고 키 순서대로 배부받은 교번을 부착했다. 당시 180 조금 넘는 정도로 키가 큰 편에 속했던 나는 1소대 1 생활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부사관 교육대대 1중대 1소대 106번, 그것이 10주 동안 내가 달고 다녀야 할 이름표였다. 교관이 나를 지목하면, 누군가에게(주로 교관) 무언가를 질문할 때, 그리고 내 순번에서 무언가를 치러야 할 때 어김없이 말 끝에 붙여야 나의 소속과 성명을 붙여야 했다. 관등성명. 그것이 나를 나타내는 행위임을 확인하면서 나는 끊임없이 되뇌었다. 106번 부사관 후보생 ㅇ ㅇ ㅇ. 


생활반 내에서는 당연히 막내의 위치에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라고 한다면, 나와 나이가 똑같은 친구가 같은 생활반 안에 있었다는 것. 지금은 연락이 끊긴 지 오래이고, 훈련소 내에서는 자리가 약간 떨어져 있어서 당시에는 크게 친밀감을 가졌던 정도는 아니었지만, 존재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서로에게 응원이 되는 존재였다. 가끔씩 눈빛 교환을 통해 서로가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음을 대견하게 여겨주기도 했었고. 아무튼, 임관 평가가 시작되는 6주 차 전까지는 꽤나 널널한(?) 훈련들을 받았다. 훈련소에서 기록했던 수양록을 들여다보면, 입소 초기 코감기가 떨어지지 않아 고생했다는 이야기와 식단에 관한 불평, 그리운 밖의 음식들에 대한 이야기로 온통 도배가 되어 있다. 그리 힘겨운 나날들은 아니었다는 증거이다. 


"너는 군생활 잘할 거 같아"


해병대 병사로 전역을 한 이후에 사회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부사관으로 지원했던 생활반 동기가 나에게 건넨 말이었다. 비록 그 동기는 불미스러운 사건(담배 반입)으로 인해 조기 퇴소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그의 말은 훈련 내내 나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체력적인 한계나 답답한 생활들에서 어려움을 느낄 때마다 그 말을 곱씹으며 임관을 해내고야 말 것이라는 각오를 다져나갈 수 있었다. 이래저래 갑갑한 생활들을 견디며 마침내 훈련 기간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극기주'를 맞이했다. 


안타깝게도 그날의 기억들이나 기록들이 자세하게 남아있지는 않다. 아마도 내 머릿속에서 그와 관련된 기억들을 애써 지워낸 모양이다.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기억들은 뇌가 자정 작용을 통해 자연스럽게 잊게 한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나라는 사람의 밑바닥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기억과, 저질 같았던 체력을 끊임없이 원망하며 버텨냈던 그날의 기억들을 서툴지만, 더듬더듬 짚어가 보려 한다. 


위이이이잉---


극기주는 이른 새벽 사이렌 소리로 시작됐다. 우리는 제대로 된 복장도 갖추지 않은 채로 연병장으로 달려 나갔다. 연병장에 미리 배열되어 있던 목봉(하나당 330KG에 육박하는 굵고 기다란 통나무 모형의 나무) 옆에 사전에 협의된 교번 순으로 위치에 알맞게 섰다. 하나의 목봉당 대략 여섯 명 정도가 붙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관의 구령에 맞춰 목봉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뒤, 왼쪽 어깨, 오른쪽 어깨 위로 번갈아 움직였다. 팔이 찢어지고 어깨가 짓눌리는 엄청난 고통이 이어졌다. 시간상 길지는 않은 시간이었지만, 좀처럼 흘러가지 않았던 목봉과 함께하는 시간에도 다행히 끝은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어깨와 양팔을 흔들며 무사히 식당으로 향해 아침 식사를 마쳤다. 아침 식사 이후에는 약 30KG 정도가 되는 완전군장을 멘 상태로 연병장에 다시 집합했다. 행군이 출발하기도 전이었지만, 벌써부터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왔다. 나 이번주 무사히 버텨낼 수 있을까? 


극기주 동안 거쳐야 했던 모든 훈련 장소를 군장을 짊어진 상태로 이동했다. 사격장, 고지점령 훈련장, 유격장... 날이 갈수록 피로는 쌓여갔다. 중도 하차하는 동기들도 훈련 중간에 몇몇 눈에 띄었다. 정말 지독한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행군 중에는 그저 앞사람의 군장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눈앞의 군장이 '털썩' 하고 주저앉지 않는 이상 나는 이 눈앞의 군장만 보고 따라붙겠다는, 단순하지만 비장한 각오로 30KG의 중압감을 버텨낼 수 있었다. 당시 나의 몸무게는 60KG 초반이었으니, 평소 체중의 1.5배로 걸어 다니는 것과 같았다. 70KG 중반의 몸무게로 60KG의 중량 스쿼트 정도는 가뿐하게 해내는 지금과는 천지 차이가 났다. 때마침 5월에 접어들어 극심한 더위도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뭐 하나 긍정적일 게 없는 가운데,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절대적으로 흘러가는 시간뿐이었다. 지독히도 천천히 흘러갔지만, 그래도 그렇게라도 흘러가준다는 사실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진정한 체력적 한계는 극기주가 끝나기 전날에 찾아왔다. 


이른바, '무박 행군'. 훈련 중의 꽃이라는 극기주, 그 가운데에서도 꽃봉오리를 담당하고 있는 '천자봉 등반'이 메인이벤트로써 남아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밤부터 시작하여 잠을 자지 않고 다음날 아침 시간대까지 천자봉을 등반하여 정상에 오르는 해병의 상징과도 같은 훈련이었다. 출발 전부터 단단히 각오를 했지만, 나의 정신력은 체력적 한계와 맞물려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내가 지니고 있던 수통에서 계속적으로 물이 새고 있다는 사실을 행군의 중반에 이른 새벽 시간대가 되어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출발 직전 가득 채워놓았던 수통의 물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지만 절반도 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남아있는 물을 전부 입안에 털어 넣었다. 어차피 행군을 하며 바닥에 뿌릴 바에는 단숨에 마셔버리는 편이 나았다. 물은 훈련 중에 정확히 행군 출발 전에만 보급되었고 이후로는 일절 제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교관이 미리 통보한 상태였다. 단숨에 물을 들이켰기 때문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갈증이 몰려왔다. 절망과도 같은 상황이었다. 


"진짜, 한 모금만 마셔야 돼."


잠시 휴식을 취하던 때, 너무 목이 말라 한 동기에게 물을 좀 줄 수 있겠냐는 염치없는 부탁을 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당장 눈앞에 띈 키가 작고 안경을 낀 어리숙해 보이는 동기였다. 나는 딱 한 모금만 마신다며 그의 수통을 받아갈 수 있었지만, 끝끝내 지독한 갈증을 참지 못하고 세 모금이 넘는 양의 물을 입안에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아, 뭐 하는 거야! 놀란 수통의 주인이 도로 수통을 가져갔지만, 나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수분 보충을 해낸 뒤였다. 다시 생각해도 참, 내 과거의 모습이 추잡하고 안타깝다. 그전까지만 해도 스스로를 꽤 괜찮은 사람이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주변 사람들을 챙길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생각을 과감하게 박살 냈던 나의 과거다. 스스로가 참 부끄럽고, 다시 떠올려 봐도 그 동기에게는 미안한 마음만이 남는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지나가던 또 다른 동기가 한마디 거들기도 했다. "동기끼리 잘하는 짓이다" 극한의 상황에 내몰리면 인간이 어디까지 추해질 수 있는지를 몸소 겪었던 순간이었다. 평소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창피함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당장 그 순간에는 그 어떤 사회적인 비난이나 양심 같은 고리타분한 성격의 것들을 따질 만한 인간성이 나에게는 남아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찌 보면 하나의 핑계로 들릴지는 모르겠으나, 그 정도의 극한에 내몰려있던 상황이었다. 지금에 와서도 깊이 반성하고 성찰하는 중이다. 


동기에게 있어서도 소중한 자원이었던 물을 수탈하기까지 했지만, 나는 행군 도중에 주저앉고 말았다. 전날 내린 비로 인해 한 산을 등반하다가(행군 코스 안에 여러 개의 산등성이가 있었다) 미끄러져 넘어지기를 수십 번 반복하고 나니 그 산을 마침내 넘어 내려왔을 때쯤 내 체력이 바닥나 있었다. 거의 다 왔으니 조금만 힘내라는 교관의 목소리는 행군 중반부터 시작해서 끊이지 않고 들려왔으나 좀처럼 행군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거의 다 왔으니 조금만 더 버텨 후보생들! 그 소리가 귓가에 계속해서 맴돌았지만, 어느 순간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부터는 좌절감만이 더욱더 커져갔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행렬과는 한참이나 뒤처진 패잔병과도 같은 무리에 섞여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나를 포함해서 총 네 명 정도가 기존 행렬에서 떨어진 등산길을 좀비처럼 걸어가고 있었다. 나에게 순진하게 수통을 넘겨줬었던 그 동기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상당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조금만 쉬었다가 갈까"


우리들 중 누가 제안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제안이 귓가에 울려 퍼진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대로 오르막길 한복판에 주저앉았다. 털썩- 털썩- 털썩- 털썩-... 등에 메고 있던 군장이 바닥에 달라붙자, 하늘로 날아갈 수도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깃털 같이 가벼워진 몸에 기뻐할 겨를도 없이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주변은 누군가가 검은색 페인트로 마구 범벅을 해놓은 듯이 깜깜했다. 쉬익- 쉬익- 주변 동기들의 숨소리만이 어둠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대로 잠들어도 괜찮냐는 물음이 어렴풋하게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금세 희미하게 멀어졌다. 나는 지금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 거지. 춥고 배고프고... 너무 졸리다. 그렇게 얼마간 눈을 감고 있을 때, 멀리서 불호령이 귓가를 두드렸다. 


후보생들!!!


교관 중에 한 사람이 뒤처진 우리들을 향해 소리쳤다. 아마 인원 파악을 하던 중 결원이 발생한 사실을 확인하고 왔던 길을 돌아와 주저 앉아있는 우리들을 발견했던 것이리라. 눈이 번쩍 하고 뜨였다. 모두들 허겁지겁 군장을 다시 둘러메고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교관을 향해 무거운 뜀박질을 했다. 어느새 동은 터서 주변은 어느 때보다 환했고, 눈치도 없는 새소리는 맑고 청아하게 산속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뒤처진 좀비 무리는 뒤늦게나마 무사히 천자봉 등반을 마칠 수 있었다. 보다 완벽하게 해내지 못해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어쨌든 그러는 가운데에서도 얻은 것들은 분명 있었다. 나 자신이 극한의 상황에 내몰리면 어디까지 추락하는지를 통해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었고, 웬만한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쉽게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소 겪으며 깨닫게 되었다. 아직까지 살면서 체력적으로 그때보다 힘겨운 날은 겪어보지 못했다. 어느 때보다도 춥고 배고프고 졸렸던 그날의 고통결국 나를 죽이지 못했고, 나는  속에서 살아남아 한층 더 성장한 모습으로 꽤나 쓰라린 고난들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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