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부사관 후보생이 되다
"어차피 못 버티고 퇴소할 거야."
포항에 위치한 해병대 교육 훈련단에 입대하기 전날 밤, 세상모르고 자고 있던 내 모습을 내려다보며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건넨 말이다. 당시 나는 180 가까운 큰 키였지만, 몸무게는 60KG 초반 정도의 아주 앙상한 몸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앙상하게 잠자리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걱정스러운 마음에 눈물을 훔쳤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에게 한치의 거짓도 포함되지 않은 진심이 담긴 위로의 말을 건넸던 것이다. 누가 봐도 해병대, 그것도 부사관 훈련을 받을 만한 체격이 아니었다며 아버지는 훗날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나도 가끔 어떻게 당시 그런 안쓰러운 몸을 하고 훈련을 받을 수 있었던 걸까 하는 생각들이 떠가기는 한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던 경험이 그런 체력적 한계를 극복했던 일이어서 훗날 겪을 모든 고통들에도 담담히, 그리고 꿋꿋하게 버텨나갈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입대하던 날, 수많은 빡빡머리들 사이로 나 역시 당당히 빡빡머리로서 섞여 들어갔다. 어디선가 등장한 교관이 인파들에 앞장서서 마지막으로 어머니, 아버지에게 절을 하라고 했다. 두리번거리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발견하고는 깍듯이 절도 올렸다. 10미터 이상 떨어진 거리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 계셨다. 내가 절을 하자, 아버지는 손을 흔들며 웃었고 어머니는 뒤돌아 눈물을 훔쳤다. 나도 일순간 눈시울이 붉어져 눈물이 쏟아져 내릴 듯했으나, 그러기 직전에 교관이 힘찬 구령으로 나를 포함한 빡빡머리들을 훈련소 안으로 인솔했다. 나는 미처 흘리지 못한 눈물을 삼키며 교관의 구령에 맞춰 행렬을 따라갔다.
커다란 강당에 약 180명(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정도 되는 인원을 모두 모이게 한 뒤에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했다. 가장 고참으로 보이는 교관이 무대에 올라와 앞으로 진행되는 훈련 일정에 대해서 순서대로 설명하고, 약 10주 간의 훈련기간을 거친 뒤에 해병대 부사관으로 임관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 이 강당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훈련은 시작된다. 앞으로 호칭은 여러분들이 아니라 후보생들이라고 하겠다. 빨간색 팔각모를 눌러쓴 교관이 그런 말들을 이야기 중간중간에 지껄였지만, 군대에 왔다는 사실이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뭐랄까, 고등학교에서 수련원으로 2박 3일 캠프를 온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정해진 임시 교번 순서대로 가장 앞자리부터 강당에 착석을 했는데 나는 가장 끝줄에 앉게 되었다. 옆자리에 나란히 앉은 동기 두 명 역시 나와 같은 나이였는데, 그를 바탕으로 같은 줄에 앉은 우리들은 임시로 주어진 교번이 나이 순서임을 추론해 냈다. 하긴, 생일이 막 지나 만 18세가 된 나와 내 옆자리 친구들이 가장 어릴 수밖에 없었다. 앞에 앉은 180여 명은 모두 우리보다 나이가 많다는 뜻. 교관은 매 훈련 기수마다 3~40명 정도는 임관하지 못하는 인원이 발생한다고 했다. 군대 간다고 온 동네 떠들어댔는데, 퇴소를 당해서 돌아가게 된다면 그것만큼 창피한 일이 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버티겠노라 다짐했다.
강당에서의 간단한 설명들이 끝나고 밖으로 나와 대열을 갖추었을 때, 이미 해는 온데간데없고 날은 어둑해져 있었다. 조리병들이 철수하기 직전에 식당에 들어가 누군가가 미리 퍼다놓은, 다 식어버린 급식을 먹어 치웠다. 첫 메뉴에 치킨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식어서 눅눅했지만 그래도 먹을 만했다. 그때까지도 군대에 왔다는 사실이 와닿지 않았다. 아직까지 어색한 새 학기에 수련원에 왔다는 느낌이 강했다. 간단하게 점호를 마치고 꿉꿉한 냄새가 나는 침낭에 몸을 밀어 넣고 누웠을 때에도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분명, 어제까지 가족들과 함께 밤을 보냈던 것 같은데,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런 생각들로 눈을 좀처럼 감지 못하고 있던 그때였다.
"335기 후보생들 복도로 집합!"
불호령 같은 소리에 다들 허겁지겁 침낭에서 기어 나와 좁은 복도에 집합했다. 1층에 별도의 생활반에서 생활하고 있는 여군 후보생들을 제외하고 150여 명의 빡빡머리들이 좁은 복도를 빽빽이 채우며 4열로 길게 늘어섰다. 복도의 폭은 숨 막힐 정도로 좁았다. 잘 쳐줘봐야 성인 남성 다섯 명이 겨우 나란히 온몸을 구기고 설 수 있을 정도. 빨간 모자를 깊이 눌러쓴 교관이 복도에 우리들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그의 얼굴 절반은 이미 모자의 챙에 의한 그림자로 가려져 있었다. 잠시 뒤, 우리들의 잔동작이 잦아들자 가려지지 않은 교관의 입이 열렸다. 어깨동무 실시. 비좁은 복도에서 우리 빡빡이들은 주춤주춤 뒤쪽으로 물러나면서 충분한 간격을 만들어 어깨동무를 했다. 아직까지 추위가 가시지 않은 날씨였지만, 그 복도만큼은 엄청난 열기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울려 퍼지는 교관의 목소리는 그 어떠한 감정의 고저도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낮지도 높지도 않고, 크지도 작지도 않게 적당히 은은하게 복도에 울려 퍼졌다.
앉아. 일어서. 앉아. 일어서. 앉아. 일어서...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그의 구령에 맞춰 움직였다. 처음에는 어느 줄은 느리거나 또 어느 줄은 빠른 속도로 동작을 반복하며 좀처럼 통일되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여기저기서 한숨이나 궁시렁거리는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좀처럼 멈출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보이는 교관의 떨림 없는 목소리에 다들 눈치를 챈 듯, 수백 번의 반복 끝에 그의 구령과 거의 동시에 백여 명의 머리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기 시작했다. 잡담도 잦아들었다. 교관에게 완벽한 기계와도 같은 우리들의 움직임을 보이기 전까지 이 상황이 종료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암묵적으로 깨닫게 되기까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느새 그곳에는 교관의 구령과 복도를 가득 메운 몸들이 오르락내리락할 때 울리는 공기의 저항 소리말고는 그 어떤 울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앉아. 후우욱. 일어서. 후우욱. 앉아. 후우욱. 일어서. 후우욱. 잠깐의 정적 이후에 교관은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니네들이 밖에서 무얼 하고 왔든 지금부터는 해병대 부사관 후보생이야. 정신 똑바로 차려, 알겠어?"
교관의 말에 물음표가 채 찍히기도 전에 복도는 150명의 것이라 믿기 힘든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알겠습니다. 인간은 극한의 상황에 내몰리면 그 어떤 때보다 확실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이다. 교관은 그대로 우리 쪽을 몇 초간 응시한 뒤 몸을 돌려 우리로부터 멀어졌다. 찰그랑- 찰그랑- 해병대 교관만이 찰 수 있다는 쇠링의 소리가 아득히 멀어져 사라졌을 때, 여기저기서 한숨과 함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래서 우리 왜 기합(얼차려) 받은 거야?
우리들 중 그 누구도 그 좁아터진 복도에서 어떠한 이유로 우리가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해야 했는지 끝끝내 알아낼 수 없었다. 일일이 피어나는 궁금증들을 완벽하게 거두어들이는 쪽이 앞으로의 생활을 헤쳐나가기 위해 맞는 길인 듯했다. 불필요한 반발심을 10주 동안 키워갈 필요는 없다. 교관의 신경을 굳이 거스를 필요도 없다. 우리는 그저 그들이 내려주는 교육이나 훈련을 달게 받으면 그만이었다. 소등 이후 취침을 하라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335기 후보생들은 각자의 생활반으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날 아침 동기 중 한 명이 지난날의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다가 허벅지 근육이 흘러내려(횡문근 융해증, 최근 훈련소에서 과도한 얼차려로 발생한 사망 사건의 그 질병) 집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제야 어느 정도 실감이 났다. 나는 군대에 왔구나. 캠프가 아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