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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필 Oct 19. 2024

문학 소년, 그런데 노래를 곁들인

인생에서 진심을 다하고 싶은 목표에 대해


암울한 상황에 갇혀 어둠 속을 걷는 것만 같았던 시기도 어떻게든 흘러는 갔다. 뚜렷한 굴곡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무난하게, 그리고 야속하게도 시간은 나를 내버려 두고 달리었다. 어느새 고등학교 1학년으로 보내야 했던 한 해는 다 가있었고, 나는 겨울 방학이라는 꽤 괜찮은 자유 시간을 얻어낼 수 있었다. 여전히 방학 특강이니 뭐니, 학교와 완전히 끊어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길고 긴 나의 암흑기에 마침표를 찍어준 것은 역시 음악이었다. 기타 치는 친구로부터 추천받은 가수, Jason Mraz의 라이브를 접한 뒤 인생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어느 정도 윤곽을 그려낼 수 있었다. 독특한 사운드의 'Geek in the pink'라는 곡에 반해 이것저것 Jason Mraz의 라이브를 뒤져보다가 EBS 스페이스 공감이라는 무대에서 공연한 영상을 찾아냈다. 이보다 더 신나게 즐기면서 노래할 수 있을까. 한눈에 이 사람이 음악에 대해서 얼마나 마음을 쏟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영상이었다. 'Life is Wonderful'의 라이브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음악에 대한 열정과 진심뿐만 아니라, 인생 자체의 아름다움을 즐기면서 노래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Wonderful-했다. 앞으로 인생은 이 사람처럼 즐기면서 살고 싶다. 그런 생각이 스쳤다. 


우울한 시기는 언제나 인생이 흘러가는 도중, 노크도 없이 찾아온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열정을 쏟으며 즐길 수만 있다면, 인생은 언제나 재미있는 놀이터가 될 수가 있다. 남들이 다 가는 길을 가기에는 이미 내가 너무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모두가 비슷한 길을 나아가는 데에 좀처럼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나는 조금은 다르지만, 더 즐길 수 있는 길을 걸어가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Mraz처럼 진심을 다해 인생을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집에 있는 시간에는 기타를 치며 노래 연습을 했다. 차마 '열심히'라는 부사를 붙일 수 없는 것은, 어린 마음에 확신을 얻었다고는 하나 뚜렷하지 않은 결과를 향해 나아가는 듯한 느낌을 지우지 못해서 온 힘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최선을 다하기에는 환경 또한 녹록지 않았다. 위, 아래, 옆 집 모두의 소음을 공유하고 있었던 빌라에 살던 때라, 큰 소리로 기타를 치며 노래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부모님이 하는 돈가스 가게도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이전처럼 음악 학원에 보내달라는 이야기를 감히 꺼낼 수도 없었다. 이래저래 참 쉽지 않았다. 


학교를 오가는 동안에 음악을 참 많이 들었다. 당시에 즐겨 들었던 가수 박효신 님이 한 학원에 강연을 나와 노래를 잘하기 위해서는 노래를 많이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하는 영상을 시청했기 때문이었다. 답답한 마음으로 밤늦은 새벽, 근처 공원에 나가 홀로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가끔씩 술에 잔뜩 취해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낯 뜨거운 대면을 하기는 해야 했지만, 따로 노래를 할 공간이 없었던 나로서는 나름의 최선이었다. 상상 속의 수많은 관객들을 눈앞에 두고 인생을 부르짖었다. 학교가 쉬는 날이면, 부모님 가게에 가 서빙을 도왔는데, 손님이 없는 한가한 시간에는 중간중간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근 채 노래 연습을 하기도 했다. 만족스러운 연습을 해내지는 못했지만, 주어진 시간 안에서 최대한 노력할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을 찾던 시기였다. 


음악과 더불어 하나의 꿈을 더 키워나갔다. 그것은 바로 '문학'이었다. 스스로가 또래에 비해 생각이 지나치게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런 생각들을 글로 풀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생각이나 의미를 응축적으로 전달하는 '시'보다는 길고 장황하게 풀어내는 '소설'이 더 적성에 맞을 것 같아 막연히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문학 역시 인생에 대한 노래와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음악과 그 결을 같이한다고 느꼈다. 이 생각에 큰 영향을 끼친 하나의 일화가 있다.


가수 윤형주 님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6촌 형인 윤동주 시인의 시에 자신의 곡을 입혀 노래를 부르고 싶어 했지만, 부친인 윤영춘 교수의 한마디에 쉽사리 그러지 못했노라고 말했는데, 그 한마디는 다음과 같다. 


"시는 이미 노래야. "


음악으로써의 노래는 그 자체로 노래이지만, 시 역시도 하나의 노래라는 말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인생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표현들 역시도 노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인생을 즐겁게 살며 노래한다는 행위는 어쩌면 모든 인생들의 수많은 행위들을 포괄하는 말이지 않을까. 나는 그 자체로 음악으로써 노래하는 것도 좋았지만, 내 생각들을 글로 담는 것 역시 좋아했다. 그것 역시 나만의 노래가 될 수 있는 셈이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는 많은 기회들을 접하기 위해 노력했다. 음악적으로든, 문학적으로든. 우선은 고등학교 축제 때 무대에 서는 것을 시작으로, 교내에서 노래를 부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앞장섰다. 외적으로도 청소년 가요제, 당시 유행하던 슈퍼스타K와 같은 오디션에 나가기도 했다. 물론, 그런 기회들 속에서 제대로 꽃 피우지 못했기 때문에 방구석 록스타로 남아야만 했지만, 그런 도전들은 내가 음악을 통해 인생을 즐기는 행위 그 자체였다. 


학교 도서관에 자주 드나들며 좀처럼 손에 익지 않았던 독서를 끈질기게 이어나갔고, 조야할 수밖에 없었던 소설과 일기를 쓰는 일도 지속해 나갔다. 몇몇 청소년 문학상들에 작품도 응모해 가며 두세 편의 단편 소설들을 완결 지을 수 있었다. 그중 하나의 문학상 대회에서는 전국에서 100명만 뽑히는 본선까지도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런 작은 희망조차도 그 시절의 나에게는 큰 힘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당시 나에게는 꿈의 여정을 위한 시간들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는 않았다. 음악과 문학의 꿈 모두를 짊어지고 달린 탓에 시간은 아주 빠르게 달려 어느덧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순간이 다가와 있었고, 나는 머지않은 시기에 성인이 되어야만 했다. 남들이 다 가는 대학에 대해서는 그리 크게 고려하지는 않았지만, 이왕 노래와 글쓰기에 대해서 준비해 온 만큼 예대 입학시험 정도는 치러보고 싶었다. 그런 마음에 두 군데 정도의 예술 대학에 지원해 보았지만, 당연히 전문 학원을 통해 교육받은 아이들에게는 경쟁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집안 형편상 예술 대학 등록금을 낼 수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무튼, 나는 진로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 어떤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현실에 대한 고려 없이 음악과 글쓰기에만 몰두할 형편은 못되었다. 그렇게 선택의 시간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내 눈앞에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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