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을 입은 채 인생 한복판에서 표류하던 시절
음악이 곁을 지켜주며 아주 약간의 위로를 건네주기는 했지만, 떠가는 고민들 가운데 그 어느 것 하나 해결되지 않는 답답한 현실 속에서 여전히 나는 헤매야만 했다. 오히려 고등학생이 되자 주변의 조급한 기류들이 나를 한층 더 못살게 굴었다고. 중학생 때와 고등학생 때는 마음가짐이 달라야 한다는 둥,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미리 내신 관리에 힘쓰면서 대학교 수시 준비도 해나가야 한다는 둥. 평생에 걸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제대로 된 고민을 해야 마땅한 시기에 왜 우리는 '입시'라는 단순한 하나의 정거장만을 바라보도록 내몰려야 하는 걸까. 좀처럼 풀리지 않는 의문과 기나긴 싸움을 해나가야만 했다. 지금 생각해도 우리나라의 교육 제도나 당시 내가 처했던 상황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본다. 요즘이라고 크게 달라 보이지도 않는다만.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에도 역시 100세 시대라는 말은 널리 퍼져있었다. 내가 당시 16살이었으니, 인생의 1/5도 되지 않은 지점에서,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시점에 중대한 선택을 해야만 하는 낭떠러지에 떠밀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앞으로 이런 식으로 다섯 번을 더 살아도 내 인생을 채 살아내지 못하는데, 좀 더 고민의 시간을 길게 가져가도 괜찮지 않을까?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의 교육 과정(다른 나라의 사정은 잘 모르겠다만)은 인생에서 지녀야 할 가치관이나 여러 직업적 가치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겉핥기식 소개로 넘어가버리고, 수학과 영어, 그리고 국어 문제 풀이가 인생의 전부라도 되는 것처럼 가르치려 든다. 입시를 준비했었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미적분이나, 영어 문법을 활용해 본 적이 거의 없다시피 한 실정인데도 말이다. 왜 이런 단편적인 지식들에만 매몰되는 교육 방식을 고집하는 걸까. 당시에도, 지금도 당최 이해가 가질 않는다. 소중한 시간을 들여 익혔던 그런 '입시 기술'은 대학을 갈 때 말고는 내 인생에 별다른 도움이 되어주지 못했다. 나는 좀 더 인간의 생에 대해서, 앞으로의 인생과 사회에 대해 깊이 들여다보며 고민하고 싶었지만, 어른들은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숫자들과 외국어로 짜놓은 객관식 문제들을 내어놓으며 나에게 억지로 풀기를 강요했던 셈이다. 나는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당장에 내가 좋은 대학에 합격한다면, 부모님은 기뻐하겠지. 학교에 현수막을 걸 수 있으니 선생님들도 진심으로 그런 나의 성취를 반겨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다음엔? 16살에는 알 수 없었던 것을, 수학과 영어, 국어 공부를 해나가면 20살쯤엔 알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 좋은 대학은 분명 꽤 괜찮은 일자리를 얻는 데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좋은 일자리가 굳이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해낼 수 있는 것이라면? 뒤늦게 그런 사실들을 알게 된다면 나는 고등학교에서 보낸 3년을 허비하게 되는 셈이 아닐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무턱대고 대학 입시 준비에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대학을 간 다음에 하고 싶은 걸 하자."
학교를 무단으로 지각했던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내게 건넸던 한마디였다. 애초에 나의 고민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검토하지 않은 듯한 수준의 성의 없는 답변이라는 느낌. 이런 사람의 말을 믿고 일. 단. 은. 대학을 가는 게 정녕 맞는 길인가? 그전부터 이런 어른들의 안하무인적인 태도로 인해 나는 고등학교 생활을 후회와 절망으로 하루하루 채워 나가고 있었던 터였다. 친한 친구들과 일명 '빨간 등대' 사건으로 명명한 그 일이 일어난 것은, 그렇게 고등학교를 반년도 채 다니지 않은 시점이었다.
여느 등교날 아침과 마찬가지로 정해진 기상 시간에 정확하게 눈을 떴다. 세수를 하고, 교복을 입고,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아침밥을 깔끔하게 한 그릇 먹어 치웠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어머니의 된장찌개였다. 든든한 뱃심으로 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또박또박 어머니를 바라보며 읊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뒤로는 어머니의 잘 다녀오라는 인사가 들렸다. 현관문이 닫혔고 나는 엘리베이터에 타기 위해 아파트 복도를 걸어 중앙 로비로 향했다(당시 살았던 아파트는 복도식 아파트였다). 평소와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 1층으로 내려왔다. 거기까지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등굣길이었다. 하지만, 아파트 단지를 평소처럼 가로질러 가는 와중에, 문득 태어나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던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학교에 가야 할 내가, 학교로 향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거지?
훗날 어머니에게 전해 듣기로는, 그 일이 있기 바로 전날에 유명한 외국 영화 하나를 보고서는 내가 고심 가득한 얼굴을 한 채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그 영화가 무슨 영화였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으나, 어렴풋하게나마 <쇼생크 탈출>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자유를 갈망하는 주인공의 서사'로 기억하고 있으니, 아마 아주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나 역시도 잠자리에 들면서 무의식 중에 이전에 없던 탈출을 꿈꿨던 것이리라.
내가 하루쯤은 학교에 가지 않아도, 세상은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될 때까지 결석은커녕 지각조차도 해보지 않았던 내가 마음먹기엔 꽤나 큰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아주 단순한 이유 하나를 머릿속에 가득 채운 채로, 나는 학교로 가는 버스가 멈춰서는 정류장이 있는 곳과는 정반대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평소대로라면 정류장이 위치해 있는 아파트 단지 정문으로 나갔어야 했지만, 아파트 단지 후문으로 돌아나가 길게 이어진 숲길로 들어섰다. 한번 결심한 것이니 오늘 학교는 절대로 가지 않겠다 마음먹었더랬다. 내 굳건한 의지를 자칫 흐트러뜨릴지 모를 잡생각을 거두기 위해 MP3를 꺼내어 연결되어 있던 유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Eric Benet의 앨범 중 명반이라고 평가받는 정규 3집 Hurricane의 첫 번째 트랙인 Be my self again의 경쾌한 기타 뮤트 반주가 흘러나왔다. 덕분에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음악과 함께한 덕분인지 우려했던 잡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저 어디까지 걸어 나갈지, 왼발을 옮긴 다음 정확하게 오른발을 어느 지점에 낙하시킬지 하는, 순간순간의 것들에만 집중하며 앞길을 나아갔다. 바다가 보고 싶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내 기억이 맞는다면, 이 숲길의 끝에는 오이도의 빨간 등대와 방파제, 그리고 서해안 바다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음악에 맞춰 리듬을 타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침내 숲길은 끝이 났고, 옥구도가 있는 옥구공원에 들어설 수 있었다. 예전에는 섬이었던 지역이었지만 중간의 땅을 매립해 현재는 육지로 이어진 곳. 옥구도는 정왕동 내에서 우뚝 솟아 있지만(나머지 동네들이 다 매립지이기 때문이다), 높이가 높지는 않아 정상까지 올라가는 데에 빠른 걸음으로 15분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는다. 나는 교복 차림에 책가방을 맨 채, 아침 운동을 나온 어르신들을 스쳐 지나며 옥구도 정상에 올랐더랬다. 숨이 조금 찼다. 정상에 올라 내려다본 바다는... 어딘지 모르게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바다에서 잠깐 왼편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빨간 등대까지 방파제가 이어져 있는 오이도로 가는 길이 보였다. 마침 방파제를 따라 앉을 수 있는 의자들도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저기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면 무언가 꽤 괜찮은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뭔가 영화의 한 장면 같고, 그렇잖아.
하지만, 옥구도 정상에서 내려와 찾아간 벤치에서 역시, 만족스러울 만한 풍경이나 생각들을 건져내지는 못했다. 그저 눈앞에 바다들이 펼쳐져 있고, 그 위를 갈매기들이 끼룩끼룩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을 뿐. 잔잔한 바다는, 갈매기들은, 그리고 바닷바람은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들을, 생각들을 들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냥, 집에 가자.
"그래도 고등학교는 졸업하면 안 되겠니?"
내가 여기저기 쏘다니는 동안 아주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바다를 본 뒤(정말로 보기만 한 뒤) 집으로 돌아가 아무 생각 없이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문을 활짝 열며 다급하게 들어오셨다. 당시에는 부모님이 돈가스 가게를 운영할 때라, 원래라면 그 오전 시간대에 아버지가 집에 찾아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학교에 가지 않은 내가 있지는 않을까 생각하며 집에 들렀던 것인데 마침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 아버지는 나를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일단은 어머니가 있는 가게로 함께 가자고 하여 아버지의 차를 타고 순순히 가게로 향했다. 가게에는 대성통곡 중인 어머니가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광경에, 미안한 마음이 순식간에 커졌었다고. 세상은 망하지 않았지만, 부모님을 잠시 동안 슬픔에 잠기게 했었구나. 아니, 아마 잠시라는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 속에 어머니를 울게 했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상황이었다. 학교에서 내가 등교하지 않았다는 연락을 받고 경찰에 실종 신고도 했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내가 누군가에게 납치라도 당한 줄 알았다고. 맞다, 내가 사는 동네는 그런 사건들이 자주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일어나는 곳이기는 했다.
당시 학교에 대한 나의 생각과, 자퇴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전달했지만, 어머니는 공부를 착실히 해나가거나 좋은 대학에 가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졸업만큼은 했으면 좋겠다고, 눈물을 쏟으며 이야기했다. 나는 차마 거기에 대고 '자퇴'라는 단어를 다시 입에 올리지 못했었다. 그날은, 가게에서 곧바로 학교로 향해 선생님과 간단하게 상담만을 마친 뒤 곧바로 귀가했고, 다음날부터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학교 생활이 계속되었더랬다. 아무런 의미도, 아무런 흥미도 생겨나지 않았던 학교 생활이. 나는, 영화 속 앤디 듀프레인(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처럼 멋지게 학교로부터 탈출하지 못했다.
어느 날은 담임 선생님이 조회 시간에 뜬금없이 장래희망을 기록해서 1교시가 시작하기 전까지 제출하라고 했다. 선생님이 말을 마치고 앞문으로 스르륵 교실을 빠져나가자 학급 반장을 맡고 있는 친구가 자리에서 일어나 번호, 성명, 그리고 장래희망을 종이에 적어 교탁에 올려놓으라고 소리쳤다. 장래 희망? 지금은 없는데. 쉬는 시간에 즐겁게 뛰노는 학급 아이들을 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더랬다. 어떻게 저렇게 태평하게 생각 없이 웃으며 지낼 수 있는 거지. 인생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인 것은 나와 마찬가지일 텐데. 정해진 것이라고는 언제가 될지 모를 죽음밖에는 없고, 당장에 주어진 환경은 겨우 수학이나 영어 따위를 공부하라는 어른들에 둘러싸인 이 암울한 감방과도 같은 학교밖에는 없는데, 어떻게 저렇게 즐거울 수가 있는 거지. 나는 잠시 교실로부터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다가, 떠오르는 미래의 내 모습을 그대로 적어 교탁 위에 올려놓았다. 한 아이가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내가 제출한 종이를 내려다보더니 선명한 비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 아이를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이내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철학자'
그저 나는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생각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다짐과, 언젠가는 그 물음들에 느낌표로 답할 수 있는 멋진 사람이 되겠다는 포부를 담아 그렇게 제출했다. 나는 여전히 수많은 물음들에 둘러싸여, 그 꿈 한가운데에서 표류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