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소년, 그런데 노래를 곁들인

인생에서 진심을 다하고 싶은 목표에 대해

by 봉필


암울한 상황에 갇혀 마치 어둠 속을 걷는 것만 같았던 시기도 어떻게든 흘러갔다. 뚜렷한 굴곡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무난하게, 그리고 야속하게도 시간은 나를 내버려 두고 내달렸다. 잠시 인생의 고민에 침잠하며 한눈을 팔고 있던 사이 고등학교 1학년으로 보내야 했던 한 해는 다 지나가 있었고, 나는 겨울 방학이라는 꽤 괜찮은 자유 시간을 얻어낼 수가 있었다. 여전히 방학 특강이니 뭐니, 학교와 완전히 끊어지지는 못했었지만 말이다.


길고 긴 나의 암흑기에 마침표를 찍어준 것은 역시 음악이었다. 기타 치는 친구로부터 추천받았던 가수, Jason Mraz의 라이브를 접한 뒤 인생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에 어느 정도 윤곽을 그려낼 수 있었달까. 독특한 사운드의 'Geek in the pink'라는 곡에 반해 Jason Mraz의 라이브를 이것저것 뒤져보다가 EBS 스페이스 공감이라는 무대에서 공연한 영상을 찾아냈더랬다. 이보다 더 신나게 즐기면서 인생을 노래할 수 있을까. 한눈에 이 사람이 음악에 대해, 인생에 대해 얼마나 마음을 쏟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영상이었다. 'Life is Wonderful'의 라이브는 영상으로밖에 접할 수가 없었지만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고. 음악에 대한 열정과 진심뿐만 아니라, 인생 자체의 아름다움을 즐기면서 노래하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Wonderful-했다. 앞으로 인생은 이 사람처럼 즐기면서 살고 싶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스치었다.


우울한 시기라고 할 만한 것은 언제나 인생이 흘러가는 도중에 불쑥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젖히며 찾아오곤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너무 깊이 잠식당해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열정을 꾸준히 쏟으며 즐길 수만 있다면(말은 참 쉽다), 인생은 언제나 재미있는 놀이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다 가는 길을 가기에는 이미 나라는 사람 자체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비슷한 길로 나아가는 데에 좀처럼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는 성미를 지녔다는 사실을, 다년간의 고심 끝에 알 수 있었다. 나는 조금은 다르지만, 더 즐길 수 있는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Mraz처럼 진심을 다해 인생을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 집에 있는 시간에는 기타를 치며 노래 연습을 했다. 차마 '열심히'라는 부사를 붙일 수 없는 것은, 어린 마음에 확신을 얻었다고는 하나 뚜렷하지 않은 결과를 향해 나아가는 듯한 느낌을 쉽게 지워내지 못해서 온 힘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최선을 다하기에는 환경 또한 녹록지 않았다. 위, 아래, 옆 집 모두의 잔잔한 소음마저도 공유하고 있었던 빌라에 살았던 때라, 큰 소리로 기타를 치며 노래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부모님이 운영하던 돈가스 가게도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이전처럼 음악 학원에 보내달라는 이야기를 감히 꺼낼 수도 없었다. 이래저래 참 쉽지가 않은 학창 시절이었다.


안산에 위치한 학교를 오가는 버스 안에서 음악을 참 많이도 들었더랬다. 단순히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도 맞지만, 노래를 잘하기 위해서는 잘 부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많은 음악들을 편식하지 않고 들어야 한다는 내용의 한 영상을 시청했던 탓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모두가 잠든 깜깜한 새벽, 근처 공원에 나가 홀로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도 했었다. 가끔씩 술에 잔뜩 취해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낯 뜨거운 대면을 하기도 했었지만, 따로 노래를 할 공간이 없었던 나로서는 나름의 최선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민원이 안 들어온 것이 기적이기도 하다. 그렇게 열심히 부르짖지는 않았었나? 상상 속의 수많은 관객들을 눈앞에 두고 그렇게 인생을 목놓아 불렀더랬다. 학교가 쉬는 날이면 부모님 가게에서 서빙을 도왔었다. 손님이 없는 한가한 시간이면, 중간중간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근 채 노래 연습을 하기도 했었다고. 만족스러울 만큼 연습을 해내지는 못했지만, 주어진 시간 안에서 최대한 노력할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을 찾아가던 시기였다.


나는 음악과 더불어 고심 끝에 하나의 꿈을 더 키워나갈 수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문학'이었다. 스스로가 또래에 비해 지나치게 생각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런 생각들을 글로 풀어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생각이나 의미를 응축적으로 전달하는 '시'보다는 길고 장황하게 풀어내는 '소설'이 더 적성에 맞을 것 같아 막연히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애초에 문학 역시도 어떤 의미로는 인생에 대한 노래와 같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구태여 문학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별도로 세심히 찾을 필요는 없었다. 당시 내가 이와 같은 생각을 떠올리는 데에 큰 영향을 끼친 하나의 일화가 있다.


가수 윤형주 님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6촌 형인 윤동주 시인의 시에 자신의 곡을 입혀 노래를 부르고 싶어 했었지만, 부친인 윤영춘 교수의 한마디에 쉽사리 그러지 못했노라고 말했는데, 그 부친의 한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시는 이미 노래야. "


음악으로써 노래는 그 자체로 노래이지만, 시 역시도 하나의 노래라는 말이다. 나는 거기서 더 나아가 인생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표현들 역시도 노래와 다름이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인생을 즐겁게 살며 노래한다는 행위는 어쩌면 모든 인생들의 수많은 행위들을 포괄하는 말이지 않을까. 나는 그 자체로 음악으로써 노래하는 것도 좋았지만, 내 생각들을 글로 담는 행위 역시 좋아했다. 그것 역시도 내 인생의 노래가 될 수 있는 셈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는 많은 기회들을 접하기 위해 노력했다. 음악적으로든, 문학적으로든. 우선은 고등학교 축제 때 무대에 서는 것을 시작으로, 교내에서 노래를 부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앞장을 섰다. 외적으로도 청소년 가요제나 당시 유행하던 슈퍼스타K와 같은 오디션에 나가 보기도 했었다고. 물론, 그런 기회들 속에서 제대로 꽃 피우지 못했기 때문에 방구석 록스타로 남아야만 했지만, 그런 도전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내가 음악을 통해 인생을 즐기는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학교 도서관에 자주 드나들며 좀처럼 손에 익지 않았던 독서를 끈질기게 이어나갔고, 조야할 수밖에 없었던 소설과 일기를 쓰는 일도 지속해 나갔다. 몇몇 청소년 문학상들에 작품도 응모해 가며 두세 편의 단편 소설들을 완결 짓기도 했었다. 그중 하나의 문학상 대회에서는 전국에서 100명만 뽑히는 본선까지도 올라갈 수 있었다고. 그런 작은 희망조차도 그 시절의 나에게는 큰 힘이 되어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당시 나에게는 꿈의 여정을 위한 시간 자체가 그리 많이 남아있지는 않았다. 음악과 문학의 꿈, 모두를 짊어지고 달린 탓에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러 어느덧 고등학교 졸업의 순간이 다가와 있었고, 나는 머지않은 시기에 뚜렷한 대책도 없이 성인이 되어야만 했다. 고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막연히 그때까지 해오던 음악과 문학을 동시에 계속해서 해나갈 만한 경제적 여건도 충분치 않았고, 대한민국 남자로 태어나 '군대'라는 막중한 하나의 벽이 인생을 가로막고 있는 듯한 느낌도 결코 무시 못할 만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남들이 다 가는 대학에 대해서는 크게 고려하지 않았지만, 이왕 노래와 글쓰기에 대해서 준비해 온 만큼 예대 입학시험 정도는 치러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을 안고 두 군데 정도의 예술 대학에 지원해 보았지만, 당연하게도 전문 학원을 통해 교육받은 아이들에게는 경쟁 상대조차 되지 못했었다고. 집안 형편상 예술 대학 등록금을 낼 수 없겠다는 현실적인 문제 자체를 떠안지 않을 수 있어서 나름대로는 다행인 일이었다.


아무튼, 나는 진로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그 어떤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현실에 대한 고려 없이 음악과 글쓰기에만 몰두할 형편은 결코 못되었으니까. 그렇게 선택의 시간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내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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