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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쓰북 Sep 05. 2022

​6. 마음처럼 되는 일이 없다, 승진도 그렇다

선배의 씁쓸한 뒷모습에 마음이 아팠던 승진 발표의 순간

바쁜 해외 출장 업무를 마치고 잠깐 다른 프로젝트 지원을 위해 외부 근무지로 파견을 나갔다.

이때 파견을 가기 전 처음으로 긴 휴가를 썼다. 근무일 기준으로 약 8일의 휴가를 사용했다. 다들 이렇게 길게 쓰면 해외에 다녀오기 위함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런 의도가 없었다.

오히려 출장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터라 푹 쉬고 싶었다. 잠깐이라도 내려놓을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때는 계획하지 않고 푹 쉬었다. 초반 이틀은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문득 여행이 가고 싶어서 속초에 다녀왔다. 중간에 갑자기 패러글라이딩을 했다.

또 즉흥적으로 펜 드로잉 원데이 클래스를 듣고 속초 여행 기간 동안 봤던 풍경 중 좋았던 모습을 그려서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길게 쉬고 왔음에도 그 효과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던 게 문제다.

외부 근무지에서 일을 할 때는 사실 이전 업무들처럼 지나치게 야근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업무의 오너쉽 자체가 들지 않았다.

이전에는 나의 일이라는 의무감이 너무 강해서 스트레스를 받았다면, 이제는 그런 의무감이 들지 않기 시작해서 스트레스를 받은 거다.

(지금도 이때 그런 감정을 느낀 이유를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 오히려 의무감에서 벗어났다면 마음이 가벼워야 했을 게 아닌가 싶은데.)


시간은 또 속절없이 흘러 연말이 다가왔다.

매년 연말이 되면 사무실에서는 올해 누가 승진이 될 것 같은지에 관한 이야기를 꼭 하게 된다.

그리고 실제 결과가 게시판을 통해 나오면 그 내용을 통해 확인하면서 축하할 사람들에게는 아낌없이 축하를 해주고,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조용히 위로를 건넨다.

팀에 승진 대상자라고 알고 있던 분들 중에 누가 봐도 꼭 올라갈 것 같다고 생각했던 선배가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승진을 하실 거고 좋은 소식만 기다리면 된다고 예상하고 있었다.


갑자기 승진 공개 방식이 바뀌어서 이제는 개인에게만 결과를 알려준다고 했다.

결과를 본인에게 물어봐야 알 수 있다는 게 생소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달라질 점이 뭔가 싶었다.

승진 발표 당일, 회사에서 당사자들에게 알렸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그리고 메신저를 통해 사람들이 여기저기 수소문하기 시작했고, 나는 팀 내 친한 후배가 대리 승진을 누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누락 소식도 너무 안타까웠고, 근무지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게 답답했다. 가까이 있다면 바로 술이라도 한 잔 하자고 했을 것 같은데.


그런데 아직 선배의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분명 예상대로의 결과가 나왔다면 나에게 한 마디 말이라도 꺼냈을 것 같은데, 연락이 없는 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결국 먼저 연락을 했다. 결과가 어떻게 나왔냐는 말을 대신해서 다른 후배가 누락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만 했는데, 그 선배의 반응은 '그래 나도 누락했어'였다.

순간 모든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답을 해야 하는 걸까 고민하다가 아무런 말도 보내지 못했고 곧 선배도 로그아웃을 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팀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선배의 누락 소식에 놀랐다. 당연히 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왜?

하지만 무엇보다 속상한 사람은 본인일 테니 티를 내지 못하고, 나도 섣불리 연락하지 못하고 꽤 눈치를 봤다.

선배가 자신의 누락에 관한 속상함을 털어내고 덤덤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던 건 몇 개월이 흐른 뒤였다.

그때 뒤늦게 사정을 들었는데, 갑자기 HR 측에서 TO를 조정하는 바람에 기존 승진대상자들 대상으로 재검토가 되었던 상황에서 밀려나게 되었다고 한다.


나에게는 그 선배가 승진 누락을 했던 일이 커다란 사건으로 느껴졌다.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팀에 기여하고, 또 후배들에게 의지할 수 있는 분이라 당연히 올라갈 거고 그러기를 바랐는데...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통제할 수 없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인지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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