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어질 결심>을 보고 난 후
비가 오는 날이면 이 영화가 자주 떠오른다.
축축하고 어두운 하늘과 무거운 공기가 마치 서래의 마지막을 닮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보면 서래와 해준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과 감정의 진실과 허위에 대해 주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여러 번 영화를 접한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눈여겨봤던 건 그들의 뒤에 가려진 인물들이었다.
해준의 가정.
즉, 그 사랑 뒤에 버려진 모든 것들.
해준과 서래의 사이는, 아니 사랑은 너무도 조용히 시작했지만 그 끝은 분명히 가까운 사람들의 삶을 무너뜨렸다.
영화 속 그들의 관계에 대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는 ‘무책임’이었다.
서래의 이국적인 배경, 비밀스러운 눈빛, 어딘가 묘한 기류. 그녀가 가진 '신비함'은 잔잔한 호수처럼 권태롭던 해준의 일상에 돌을 던졌고, 그는 그 파동에 점점 무너졌다.
나는 해준이 느낀 감정이 사랑이라기보단 충동적인 내적욕망이 투영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즉, 어쩌면 서래라는 새로운 사람을 통해서 그가 잊고 지냈던 남자로서의 감각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던 것 아니었을까? 사람은 본질적으로 본능을 완전히 떨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새로운 이성에 본능적으로 끌리는 건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준은 그 흔들림이 마치 재채기처럼, 짧게 스쳐가는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형사라는 본인의 직업윤리를 무너뜨리며 서래의 범죄를 눈감았다.
또 와이프에게 거짓을 고하며 비밀스러운 관계를 이어나갔다.
이처럼 해준의 감정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으며 선을 넘어버렸다.
의아한 점은 이 모든 과정이 그들이 주장하는 사랑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보이지 않는가.
아이러니하게 서래는 끝까지 해준과의 관계에 솔직했다. 본인을 사랑하기에 붕괴되면서까지 지켜준다는 해준의 말을 한 치의 의심 없이 믿었고, 그 믿음 속에 자신을 내던졌다.
반면 해준은 끝내 그 책임 앞에서 도망쳤다.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했습니까”라는 그의 말은 사랑을 감당하지 못한 채 결국 도망치려는 변명처럼 들리기도 한다.
둘은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며 살아남으려 했지만, 결국 서로를 더 깊이 상처 낸 존재가 된 게 아닐까.
마치 공동의존(co-dependency) 관계처럼 말이다.
겉으론 서로가 구원처럼 보이지만 실은 상대의 아픔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파괴적인 유대.
그렇게 그들은 서로의 구원이 아닌, 서로의 멸망이 되어버렸다.
서래의 마지막 선택 역시 사랑의 완결이 아닌 분명한 자기 파괴였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물속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정신적인 자유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사랑을 증명할 필요도, 책임질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그러나 그 해방은 오직 그녀만의 것이었던 걸, 그 해방은 무책임을 전제로 한다는 걸, 그녀는 끝까지 알지 못했다.
해준은 살아남았지만, 서래가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헛된 희망과 의심, 좌절, 고독 속에서 살아있는 죽음을 견뎌야 한다.
어쩌면 물속에서 서래가 느꼈을 해방은, 뭍 위에서 해준에게는 끝나지 않는 의심과 상실로 남지 않았을까.
서래는 스스로를 가둔 감정에서 빠져나왔지만, 해준은 남겨진 현실 속에 갇혔다.
이 둘의 행동에는 항상 무책임이 따라온다.
처음엔 나 또한 그저 서래와 해준의 자극적인 감정선에만 몰입했었다.
이후 영화를 두, 세 번 돌아보며 그제야 그들의 주위가 보이기 시작했고, 어쩌면 가장 깊은 상처는 그들의 바깥에 있었다.
해준의 아내는 어떤 감정으로 견뎠을까.
정대건 작가의 소설 [급류]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누군가는 사랑이 교통사고 같은 거라고 했다. 그래, 교통사고 낼 수도 있다 치자. 그런데 책임도 안 지고 벌도 안 받으면 그건 뺑소니잖아.”
맞다. 그들이 사랑이라는 명목하에 저지른 선택은, 사실상 사고였지만 그 사고 뒤에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서래와 해준은 그저 무책임한 뺑소니범이었다.
“우리는 만날 땐 결심하지 않지만, 헤어질 땐 결심을 한다.”
그 결심이란 건 무엇인가?
이 영화 속 결심은 서로를 위한 것도, 그렇다고 관계를 위한 것도 아닌 서로를 파멸로 이끄는 무책임한 결심이었다.
우리가 흔히 '사랑'이라 부르는 감정 속엔 과연 얼마나 많은 무책임이 숨어 있을까.
어떤 사랑은 결국 누군가를 풀어주지만, 또 어떤 사랑은 결국 누군가를 가둔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얼마나 많은 무책임을 저질러왔는가.
누군가가 사랑의 이름으로 저지른 파괴 앞에서 과연 우린 누구의 책임을 말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