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빼앗긴 아이들, 그 뒤의 어른들

– 독립영화 <4등>을 보고 난 뒤, 현실을 마주하며

by 유진
사진 출처: 구글


독립영화에는 현실을 비추는 힘이 있다.

극 속 배우들이 어딘가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을 것 같은 생생함.

나는 그 생생함이 좋아, 종종 독립영화를 찾는다.


얼마 전 지인의 추천으로 <4등>을 보았다.

영화에 빠져드는 동안 시간의 흐름조차 잊었고, 나는 몇 번이고 깊은 탄식과 묵직한 공감을 내뱉었다.



영화 속 준호와 엄마, 그리고 코치 광수는 모두 너무 현실적이다.

부모의 기대가 아이를 억누르고, 그 기대가 아이의 자아를 짓밟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준호는 좋아하던 수영을 포기한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신체적 폭력.

그런데 폭력을 가한 광수 역시 과거 똑같은 폭력에 짓눌려 수영을 포기했던 아이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장 싫어했던 방식을 되풀이하며 말한다.


“다 널 위해서 하는 거야.”


순간 내 심장은 내려앉았다.

혐오했던 폭력을 다시 휘두르는 모습.

그 슬픈 대물림 앞에서 숨이 막혔다.



아이에게 부모란 세상의 전부다.

그런데 영화는 부모의 일방적인 기대가 어떻게 폭력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부모 역시 피해자일 수 있다.

자신이 겪은 상처를 ‘당연한 것’이라 여기며, 아이에게 물려주는 것.


이 영화는 그 무한한 고리의 문제점을 조용히 드러낸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언니의 초등 시절이 떠올랐다.

학구열이 치열했던 강남, 언니는 부모님의 기대 속에서 늘 무언가를 해내야 하는 딸이었다.

나는 그 삶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방관자였고,

언니는 차갑고 외로운 길을 묵묵히 걸었다.


심리학에는 멘탈리즘이라는 개념이 있다.

생각, 느낌, 감정이 행동을 통제한다는 개념이다.


아이는 부모의 말과 태도를 내면화하며, 결국 자신의 행동까지 통제당하게 되기에 그 길이 자신의 꿈과는 다른 길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나는 부모님의 관심이 언니에게 집중된 덕에 자유로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동시에 외로움에 잠기기도 했다.

학원 픽업으로 비어 있던 집, 그 고요가 싫어 아파트 복도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사람의 온기를 채웠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준호의 엄마가 무너진 기대를 둘째 기후에게 옮기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기후는 준호와 달리 공부에 금세 지치고 반항하며 외친다.


“형이 다시 수영했으면 좋겠어. 엄마가 이젠 나만 괴롭히잖아!”


그 한마디가 내 마음을 때렸다.

단순한 불만이 아닌, 부모의 기대가 아이에게 어떤 상처로 다가오는지를 보여주는 절규처럼 들렸다.


어린 시절을 부모님의 기대 속에서 살아온 언니.

다행히 시간이 지나 강압적인 환경에서 벗어나자,

부모님은 진심으로 사과했고, 사랑이란 예쁜 말로 포장된 폭력을 내려놓았다.

그 순간 집은 언니에게 더 이상 감옥이 아닌, 따뜻한 안식처가 되었다.


하지만 모든 아이가 그런 변화를 맞이하지는 못한다.

요즘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4세 고시부터,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예서 책상’까지.

심지어 책상에 자물쇠를 달아주라는 문의까지 있었다.


현실은 여전히 아이들의 자유를 억압한다.

현실은 어쩌면 더 디스토피아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4등>은 희망을 보여준다.

준호는 부모의 기대와 압박에서 벗어나, 자신이 진정 즐기던 수영을 다시 시작한다.

마침내 1등을 차지하며, 자유와 자아를 되찾는다.

그 순간 준호의 얼굴에는 순수한 즐거움과 성취의 빛이 스며 있다.


영화는 묻는다.


“아이의 행복은 몇 등일 때 찾아오는가?”


답은 분명하다.

행복은 순위표에 있지 않다.

그저 아이의 웃음 속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준호와 기후가 살아가고, 또 다른 광수도 만들어지고 있다.

그런 아이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어른으로서, 우리는 아이의 웃음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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