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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자랄 것이다

day6

by 이빛소금

2025년 11월 10일 월요일 밤 11시 59분.


2021년 여름, 첫 책을 출간했다.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때만 해도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그해 겨울, 1년 동안 다닌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젠 글로 돈을 벌어야지.’ 그렇게 선언하듯 뛰쳐나왔다. 그리고 보기 좋게 실패했다. 생활고는 금세 찾아왔다.


2022년 초, 다시 회사를 전전했다. 겨울부터 여름까지 여덟 군데를 입사하고 퇴사했다. 자존감도, 자신감도 바닥을 쳤다. 가을과 겨울에는 동굴처럼 방 안에 틀어박혀 살았다.


2023년이 되자 조금씩 회복이 되었다. 다시 회사에 들어갔고, 다시 나왔다. 실업급여를 받으며 글을 썼다. 에세이도 쓰고, 단편소설 두 편도 완성했다. 독자들에게 직접 에세이를 보내주는 일도 다시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이제는 진짜 내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다시 회사를 전전했다.


2024년 겨울에도 입사했다가, 올해 4월 말에 그만두었다. 몇 군데 회사를 옮겨 다니다가 지금의 회사에 입사한 건 지난 9월이었다. 그리고 벌써 11월.


오늘은 월급날이다.
수입과 지출을 계산해 보니, 별반 다를 게 없다. 밀린 건강보험료, 전기세, 그리고 19일에 낼 월세까지 따로 빼두니 통장은 그저 월급을 스칠 뿐이다.
그래도 이번 달은 버텼다는 안도감이 잠시나마 나를 쓰다듬는다.

그리고 오늘, 아침 5시 반에 일어났다.
요가 명상 수련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덕분이다. 새벽하늘엔 달과 별이 떠 있었다. 가을의 은행잎이 노랗게 빛났다. 그 풍경이 너무 고와 잠시 멈춰 사진을 찍었다.


108배와 비슷한 동작을 하며 몸을 푸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함께 가기로 한 지인이 있어서 끝까지 할 수 있었다. 출근시간이 다 되어 먼저 나왔고, 오픈 준비를 하던 중 빛 사이로 비친 그림자가 장미꽃처럼 보여 또 한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하루가 시작됐다.

사입업체에서 샌드위치와 샐러드 단가가 인상된다는 고지를 전에 받았기에 주말에 포스회사에 연락해 두었고 아직 가격이 변동이 없어 포스 회사에 연락해 가격을 바꿨다. 지난달 적자였던 샌드위치와 샐러드가 이번 달엔 흑자로 돌아섰다는 걸 확인했다. 그것도 무려 49%나!! 압도적으로 뿌듯했다.


새로 온 직원과 케미도 좋았다. 혼자서는 엄두가 안 났던 것을 함께 했다. 정리라던가… 정리라던가… 정리라던가. 하하.

점심은 근처 호텔 구내식당에서 먹었다. 식사 후에는《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잠깐 읽다가 복귀했다. 낯선 문장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나의 목표를 향해 나의 길을 가련다. 머뭇거리는 자와 게으른 자를 뛰어넘으리라. 그리하여 나의 길이 그들에게는 몰락의 길이 되리라!" 그런 문장 말이다.

그 문장을 곱씹으며, 나의 목표를 향해 나의 길을 가겠다고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있다.


퇴근 후엔 며칠 전에 시켜 먹었던 수현이네 통닭을 데워 먹었다. 넷플릭스에서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를 틀어놓고 말이다. 며칠이 지나도 맛이 변하지 않는 치킨이라 좋다. 다른 치킨은 처음엔 맛있다가도 식으면 냄새가 나고 맛도 없어지는데, 수현이네 통닭은 건재하다.


식어도 맛있는 치킨을 씹으며 생각했다. 인생도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른다. 뜨겁게 달아오를 때가 있으면, 식어도 괜찮은 시간이 있는 법이다. 조금 덜 뜨거워도 괜찮은 맛. 지금 내 삶은 아마, 그 ‘식은 치킨 같은 시간’을 지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나는 스트레스를 어지간히 받고 있었는데 참고 괜찮은 척을 하고 있었다. 쌓였던 게 오늘 터져서 또 왼쪽 어깨와 목에 통증이 세게 왔다. 이제는 그런 척은 그만하고 싶다. 있는 그대로 있지 않은 그대로 올라오는 나의 감정을 대면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힘들면 힘이 든다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똑바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그런 힘을 더욱 기르고 싶다.


아 참, 어제는 누웠는데 심하게 가위에 눌렸고 치아가 몽땅 빠지는 꿈을 꿨다. 너무 생생해서 아침에 일어나서도 한동안 입안을 만지작거렸다. 챗지피티에게 물어보니 치아가 다 빠지는 꿈은 대체로 불안과 무력감을 상징한다고 하나 나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래된 나의 신념과 습관, 그 단단한 껍질들이 이제야 빠져나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무너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새로 나기 위한 과정. 새로운 이가 나기 전, 잇몸이 휑해지는 그 잠깐의 공백 같은 시간. 지금 나는 그 공백 속에 있다. 무섭기도 하고, 어쩐지 홀가분하기도 하다. 어쩌면 다시 자랄 나를 위해, 우주는 나의 낡은 치아를 걷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자랄 것이다. 어제의 나는 빠져나갔고, 새로운 나는 지금 자라고 있다. 내일은 또 다른 힘으로, 다른 문장으로, 다른 박자로 춤을 출거다. 월급은 통장을 스칠 뿐이지만 나는 계속 써 내려갈 거다. 월급을 받지 않아도 글을 써서 통장에 돈이 들어오는 그런 미래를 꿈꾸면서 오늘은 이만 이불 깔고 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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