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이빛소금 / 이야기] 2026.01.13. 火
“지금부터 말하는 사람 오백 원.”
초등학교 시절, 언니와 나는 무슨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잠도 안 자고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그러면 아빠가 우리 방에 와서는 “너네 잠 안자고 뭐해. 그만 떠들고 어서 자라.” 했다. 그래서 우리가 만들어낸 마법의 주문. “지금부터 말하는 사람 오백 원.” 성인이 되어서 그걸 쓸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런데 오늘, 거의 쓸 뻔했다. 지금 여기는 친구 작업실이다. 창밖으로 기와에 하얗게 눈이 쌓였다. 하늘은 푸르르고, 태극기가 펄럭거린다. 친구가 자기 작업실에서 같이 일하자고 해서 왔다. 동네에 ‘왓 어 도넛’이라는 도넛 가게에서 기본, 레몬, 얼그레이 그리고 흑임자 도넛을 사 왔다. 친구가 가위를 가져와 반으로 나눠 먹었다. 친구는 커피를 내려 가져왔고, 우리는 커피와 도넛을 먹으며
“와, 행복하다.”
“그래, 행복 별거 없어.”
이제는 ‘지금부터 말하는 사람 오백 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성인이 됐다. 나는 이렇게 글을 쓰고 있고, 친구는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참 좋다. 오늘의 배경음악은 이루마의 음악이다. 친구가 처음에는 뭘 틀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헤맸지만 정말 제격이다. 잘 골랐다.
예전에 내가 썼던 글이 있다.
아 행복하다. 계속 이렇게 행복한 감정을 보관하고 있어야 돼. 그랬다가 슬퍼지려 할 때 주섬주섬 꺼내면 돼. 그러면 계속 행복할 수 있을 거야.
사실 행복은 오래 붙잡히지 않는다. 순간이고, 찰나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이렇게 작은 행복들을 마음 어딘가에 조용히 모아두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행복은 별게 아니었다. 그저 함께 있는 거. 눈 내리는 날, 작업실에서 커피 한 잔과 도넛 한 조각을 나누는 것. 창밖의 나뭇가지는 바람에 흔들리고, 이루마의 피아노 선율은 부드럽게 흐른다.
친구는 묵묵히 일하고, 나는 이렇게 노트북 앞에서 키보드를 두드린다. “지금부터 말하는 사람 오백원” 하지 않아도, 우리는 편안하게 침묵할 수 있다. 그게 또 행복이다. 어릴 땐 벌칙 같기도 했던 오백원이, 지금은 서로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연결되어 있다는 안도감을 주는, 조용한 ‘입장료’처럼 느껴진다.
오늘 친구와 나눠 먹은 도넛의 달콤함과 이 고요한 음악 소리를 잘 보관해 두었다가, 마음이 휘청이는 날 꺼내 먹어야지. 그러면 오늘의 이 오백 원짜리 침묵이 나를 다시 웃게 해줄 테니까.
- 끝 -
[일간 이빛소금 / 이야기] 2026.01.13. 火 : 지금부터 말하는 사람 오백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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