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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ologue

엄마 나 힘들어

“엄마, 나 힘들어. 어제는 환자 두명이나 돌아가셨어. 불안해서 잠이 안 와. 오늘도 전쟁터같을까? 다리가 터질 것 같아. 더이상 힘든 일 안하고 싶다.”

“오늘은 안 바쁠거야. 어제 그렇게 힘든 만큼 오늘은 괜찮겠지. 하루만 힘내.”


한마디가 힘이 되는 그런 날.




 아침 일곱 시. expire한 환자의 시신을 운구하기 위하여 장례식장에 전화를 했다. 우리는 이 상황을 여섯글자로 표현한다. “장례식장 콜해!”

 5분 남짓 흘렀을까, 이송하는 침대가 왔다. “우리 자주 보네요.” 멋쩍어서 먼저 말을 꺼내니 “그러게요, 하.” 장례지도사분께서 깊은 한숨을 쉰다.

 응급실에도 여러번 왔다갔다 하셨단다. 힘든 티 안내는 분인데 오늘따라 기운 없은 표정이 일이 힘들었음을 말해준다. 까닭인즉슨 응급실에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 내린 젊은이가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누군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을 들을때마다 사는 게 뭔가 싶다.

 우리는 우스갯소리로 “아, 인생.”, “이래 살아 뭐하겠노.”, “인생 뭘까?” 라고들 말한다. 힘들어서 본능으로 말하는 한마디지만 인간 본연의 존재적 의문이 녹아 있다. 상당히 심오해서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나 역시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봤지만 인생을 뭐라고 정의하지 못하겠다. 굳이 논해야 한다면 인생 참 허무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자살은 사람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고민이 쌓이다가 터져서 행동으로 나타난것이다. 망자의 고충을 누군가가 경청하기만 했어도 극단적인 선택이 아닌 다른 답지를 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변 사람의 탓을 돌리면 안 되는 일이다. 부모나 친구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던, 혼자 끙끙 앓고 있었던 내막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래서 물어볼 수 없다. 오히려 타인에게 말하기 싫어서 단번에 행동으로 보였을 지도 모른다. 디지털 시대, 스마트폰 시대, 인공지능 시대라지만 사람과의 (자발적 혹은 타의적)단절은 첨단 기술이 해결해줄 수 없는 것 같다. 소통은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한다.

 말이 너무 길었다. 아무쪼록 좋은 곳에 갔으면 좋겠다. 또래 나이로써 안타깝다.

 수많은 사연이 있을 그 죽음은 사망보고서 한장으로 집약된다. 장례지도사님은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와이셔츠의 주머니에서 펜을 꺼낸다. 보려고 의도한 건 아니지만 필라멘트 담배가 보인다. 일이 끝나면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한개피 두개피 피겠지.

 죽은 사람에게는 실례되는 말일 지도 몰라서 조심스럽지만 마지막 장면을 본 그분과 의료진의 트라우마도 알게 모르게 축적되고 있을 것이다. 담배는 무의식적인 정신적 충격을 완화시켜줄 도구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나는 술도 마실 줄 모르고 담배도 못핀다. 살면서 시신 한번 안보고 곱게 사는 사람이 다반사인데 내가 이런 고생을 하는 건 불합리한 처사 같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생각만 하고 싶은데 죽음 앞에서는 한없이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이 된다. 이런 스트레스를 어찌 해소해야 하나. 일에 치이니 무력해진다.

 요즘 간호사 장기자랑 때문에 나라가 시끄럽다. 간호사 대우가 이것밖에 안되냐는 댓글이 쇄도하다. 덩달아 이국종 교수님도 핫한 이슈다. 의료법 위반이라며 그 분을 저격한 국회의원이 지탄받고 있다. 이국종 교수님은 의료진 처우 개선이 시급하다고 밝힌 바 있다.

 죽음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먹고 살기 위해, 혹은 사명감으로 하는 일이라지만 시신을 접한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마음 속이 곪아가고 있다. 병원 측에서, 그리고 정부에서 트라우마를 겪은 의료진에게 정신과 상담과 심리치료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주장과 같은 맥락의 청와대 청원이 있어서 참 반갑다. <‪중증외상센터와 의료계열 종사자들에 대한 처우개선>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43322‬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의료진 처우개선에 동참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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