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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다

이렇게 돼도 누구한테 하소연 하나 못 하는 이 신세.


환자에게 꼬집혔다. 사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볼펜 자국은 덤이다. 여지껏 이렇게 살아왔다. 그래서 놀랍지도 않다.


익명을 기반으로 글을 쓰기에, 가능한 내 신상이 공개되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건 도무지 안 보여줄 수가 없다. 이거 하나 올린다고 해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겠지.




irritable 한 할머니에게 꼬집혔다. 내 환자 돌보기에도 벅찬 상황인데, 그 와중에 인력이 없어서 옆팀이 신환을 받는 것을 도와야 했다. 아무 데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아야야야,라고 병실 떠나가게 소리친다. 이런 일은 흔하기에 이제는 무뎌졌다. 놀랍지도 않다. 다만 alert 환자가 멀리서 이 상황을 지켜보면, 내가 환자를 학대한다는 오해가 생길 것 같아 조심스러워지곤 한다.


나는 의사가 아니라 환자를 진단 내릴 자격은 안 되지만, 나의 직감으로 봤을 때 이 분은 dementia가 있는 것 같다. 아니러니 한 것은 dementia 진단을 받은 적은 없다고 한다. 가족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니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거나.


고무 바지. 몸빼바지라고들 하는데 할머니들이 전형적으로 입는 옷이다. 이것을 환의로 갈아입히려는데, 내가 하는 행동 순간순간이 무색하게 하얀 각질이 풀풀 나온다. 고무가 탁! 하며 환자의 허리춤에 탄성을 일으키면 그것들이 민들레 홀씨 마냥 침대 여기저기에 흩어진다. 마스크와 안경을 쓰고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렌즈를 착용하기가 귀찮아서 보통 안경을 쓰고 일을 하는데,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게 보안경 구실을 한다.


사실은, 나도 인간인지라 폴리 글러브를 끼고 마스크를 착용하는 만발의 준비를 하고 있어도 이 상황은 썩 유쾌하지 않다. 계속하다 보니 무뎌졌긴 하지만.


아, 공장에 다녔을 적에는 그래도 클린룸이었는데. 물론 근로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제품을 위한 클린존이었지만 말이다. 여기는 그곳과는 극과 극이다. 일상생활에서 존재할 수 없는 균이 득실득실. 사는 게 다 이런 걸까?


아니, 나 같은 사람(극과 극을 체험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거다. 내가 사는 게 그렇지 뭐.


손아귀의 힘이 아주 그냥 장난 아니다. 요양원이나 노인 복지센터에 한 번쯤 봉사활동을 가는 사람은 알 것이다. 노인분들이 오히려 정정하다. 본인이 하고자 하는 것은 악으로 깡으로 해내려고 한다. 그분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악물어가며 nasal prong을 빼고, 18G IV line 쪽으로 손을 뻗어댔다.


nasal prong을 빼는 것은 그나마 양반이다. 주삿바늘을 빼면 피가 철철 넘쳐서 시트까지 다 갈아야 한다.


그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 주삿바늘을 빼는 한쪽 손을 제지하니 산소 줄을 빼고, 다시 해 놓으면 주삿바늘 쪽으로 손을 향한다. 나 이래서 제 할 일 다 할 수 있을까? 혼자서 하기 너무 벅차다. 이른바 악순환이라고나 할까.


저기요, 할머니, '손이 가요 손이 가'는 새우과자도 아니고 왜 자꾸 그쪽으로 손이 갑니까?


문둥이 가시나야, 드센 년, 억센 년!


병실이 떠날 정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이런 말을 듣는다고 해서 놀라움 따위는 전혀 없다. 나에게 타격감을 주기 위해서 하는 말이겠지만 이런 말은 수도 없이 들어서 무뎌진 지 오래다. 한편으로는 씁쓸한 느낌도 든다. 나는 왜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욕을 먹고 맞아가며 일해야 돈을 벌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해서 월급이 많은 것도 아닌데. 남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이런 자기혐오적 생각은 환자에게 맞거나 꼬집힐 때 최고조에 달한다. 막말은 들으면 한쪽 귀로 흘려보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내 신체에 해를 입힐 정도로 나를 향한 혐오감을 드러내면 알량하게 남아있던 마지막의 무언가가 무너져 내린다.


간호사. 다른 의료인에게도 무시하고 폄하당하는 서글픈 직업. 웹툰 그리는 전문의로 유명한 모 의사는 간호사를 '앉아서 핸드폰을 만지며 키득거리는 사람'처럼 만화를 그려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뭐, 그럼 그렇지, 내가 이런다고 해서 누가 알아주냐. 항상 해보는 신세한탄을 해 본다.


수많은 문장으로 내 지질한 감정을 풀어헤쳐냈지만 이것은 환의를 갈아입히고, 자리를 정리하고, 바이탈을 하는 찰나에 스쳐 지나가는 속마음일 뿐이다. 환자에게는 항상 한 마디로 말하며 끝낸다.


"아이고, 이렇게 욕먹으니 오래 살겠네."


아니, 한 마디로 끝내지는 않는다. 항상 한 마디를 더 덧붙인다.


"사실 오래 살고 싶지는 않은데.."


인력이 부족해서 헬퍼로 온 동기가 "에이 그러면 너무 젊은 나이잖아요."라고 말한다.


답변했다. 하루하루 이렇게 지내면 사는 의미가 없다고. 이건 사는 게 아니라고. 나는 해외 봉사활동을 하며 살고 싶다고 말하니 그 아이는 "다 같은 마음이죠. 그런데 회의록 봤어요? 내년에 봉사활동 갈 사람 구하던데. 저도 낼까 봐요."라고 답했다.




정신없이 일을 하다가 그녀가 말했던 수간호사 회의록이 눈에 띄었다.


2018 캄보디아 봉사활동 갈 사람 구한다는 내용인데, 진짜 구하네. 한번 말해나 볼까? 그곳으로 가면 내 인생을 돌아보며 한숨 돌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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