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에서 프리랜서로
어쩌면 내가 프리랜서 통번역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순간,
늘 도전하며 사는 삶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직장인이던 시절을 잠시 회상해보면,
대개 일은 초반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떻게든 참고 배우면, 점차 시스템과 프로세스에 익숙해지면서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수월해졌던 것 같다.
한 달이 지나고, 한 분기가 지나고, 한 해가 지나면서 어느 정도 일이 돌아가는 '사이클'을 알 수 있었다.
거래처 담당자 이름 외우기에서부터 팀원들과 함께 사용하는 공유 파일 업데이트하기, 이메일 아웃룩 사용하기나 엑셀 수식 활용법, 비용처리나 결제 올리기 등. 처음에는 정말 사소한 것에도 버벅거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손이 점차 빨라졌고 일 처리에 속도가 붙었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반사적으로 업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고민하는 데 소모되는 에너지도 조금씩 줄어들었고, 혼자 처리할 수 있는 업무의 범위가 점점 더 넓어졌다.
함께 일하는 팀원들의 성향도 파악할 수가 있었다. 물론,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 사람의 성격이나 업무 처리 방식 등을 대충 알게 되면 그의 행동을 조금이나마 예측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회사를 다닐 때에는 내가 맡은 업무나 함께 일하는 팀원이 바뀌지 않는 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의 상황을 예측할 수 있었고, 업무 프로세스도 익숙해졌다.
내가 경험한 직장생활은 그랬다.
(물론 직장인에게는 인간관계 등 또 다른 고충이 분명 존재하고, 여러 이유로 결국 나는 퇴사를 선택했지만.)
그런데 퇴사를 하고, 대학원을 졸업한 후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요즘 드는 생각은,
한 가지 일에 조금 익숙해지는가 싶으면, 머지않아 또 새로운 일을 맡게 되고
한 담당자와 좀 친해져서 관계가 조금 편해지는가 싶으면, 또 새로운 담당자를 만나게 된다.
내가 하고 있는 통역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겠다.
통역이라고 해서 결코 그 성격이 모두 같지는 않은데, 분야가 비슷하다 해도 결국 일 자체는 다를 수 있다.
내가 실제로 겪은 몇 가지 경험들을 한번 살펴보면......
나는 대학원 재학 시절부터 이런저런 통역 경력을 쌓았다.
(수행통역을 제외하면) 처음 정식으로 맡게 된 통역은 문화예술 교육 워크숍 통역이었다.
당시 클라이언트로부터 일을 의뢰받고 나서 설레고 흥분되기도 했지만, 과연 내가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도 들었다. 대학원에서 수없이 많이 연습한 통역과는 그 성격이 달랐기 때문이다.
대학원에서는 주로 엄숙한 분위기의, 격식 있는 자리에서 하는 통역을 연습했다.
이를 테면 대통령이나 정치인이 공식 석상에서 하는 연설을 통역한다든지.
그런데 워크숍은 참가자들에게 레크리에이션을 제공하는 것이 목적인 만큼, 격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클라이언트는 참가자들의 '텐션이 업'되기를 바랐고, 행사장에서 재미있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통역사의 몫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런 성격의 통역을 잘 해낼 수 있을지 망설여졌다.
통역을 앞두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공부와 연습뿐이었다. 나는 주최 측에서 보내준 방대한 양의 자료를 꼼꼼히 읽으며 머릿속으로 워크숍이 진행되는 모습을 그려봤다. 유튜브로 다양한 워크숍 동영상을 보면서 노트테이킹과 통역 연습을 했다.
그리고 이렇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통역 연습을 한 덕분에 현장에서는 전혀 긴장한 티를 내지 않고, 웃으며 즐겁게 통역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 또다시 같은 클라이언트로부터 워크숍 통역을 의뢰받게 되었다. 이미 비슷한 경험을 한번 해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자신감을 얻어서인지, 준비과정이 그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그래서 첫 해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부담감을 갖고 통역할 수 있었고, 다행히 또다시 행사 담당자와 워크숍 참가자들로부터 이전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렇게 나는 워크숍 통역에 익숙해졌고, 주최 측에서 나를 두 번이나 찾아주었다는 사실은 내게 어느 정도의 자신감을 부여해주었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것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관련 업계에서 조금씩 인맥을 쌓으면서, 그 이후 또 다른 클라이언트로부터 워크숍 통역을 의뢰받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이름은 같은 '워크숍 통역'이라 해도 전부 다 비슷한 게 아니었다.
다음에 내가 통역을 하러 간 워크숍에는 장애인 참가자들이 많았는데, 지적장애 또는 언어장애를 가진 참가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때로는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나는 담당자와 사전에 이야기를 나누면서 통역의 관건이 '천천히,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것'임을 미리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통역 시, 최대한 천천히 말하면서, 참가자들이 모두 내 말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그들의 반응을 살피면서 통역했다.
장애인 참가자의 발음을 이해하기 힘들 때는 "~라고 말씀하신 거죠?"라고 한번 더 확인하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 확인하는 과정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이해를 도와준 것 같았다.
'아니, 같은 워크숍 통역인데 어쩜 이렇게 다르지.’
비슷한 분야의 통역도 이렇게나 다른데, 하물며 분야까지 다르다면?
그 이후에 내가 의뢰받은 통역은 앞에서 언급한 두 통역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분야의 일이었다.
‘환경'과 관련된 내용을 의뢰받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외국인 화자가 말하는 속도가 매우 빠를뿐더러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끊임없이 말한다는 말을 클라이언트에게 전해 들었다.
역시나 또 새로운 도전이었다.
통역을 의뢰받은 순간부터 나는 인터넷으로 온갖 자료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과거 언론사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부터 대중 강연 등 그가 말하는 모습을 담은 온갖 동영상을 확인해 보며 최대한 그의 말하는 속도와 발음에 익숙해지려 노력했다.
여러 인터뷰 영상을 반복해서 보다 보니 비슷하게 겹치는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고, 나중에는 그 내용을 거의 외울 정도였다.
드디어 통역 당일, 예상대로 화자의 말은 빨랐고, 말의 분량도 어마어마했다.
귀로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동시에 손으로 바쁘게 휘갈겨 노트 테이킹했고, 과연 내가 통역할 때 제대로 노트를 알아볼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미리 과거 인터뷰 영상을 여러 번 보고 들어 본 나는 그의 인터뷰 답변을 어느 정도 미리 예측할 수가 있었고, 다행히 통역을 무사히 해낼 수 있었다.
이처럼, 프리랜서 통번역사인 내가 지금껏 경험한 통역만 해도 그 성격이 모두 제각각이었다. 주변의 동료 프리랜서 통역사들이 활약하는 것을 보면, 의료 통역, 법률 통역, 금융 통역 등 통역의 분야는 정말이지 무궁무진하다.
새로운 업무를 맡을 때마다, 새로운 담당자와 함께 일하게 될 때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괜히 한다고 했나' 하며 늘 조바심 내며 긴장하지만,
그렇게 조바심내고 긴장하는 습관도 조금씩은 나아지겠지,
매 순간 도전하다 보면 통번역사로서의 '내공' 이 조금씩 쌓이겠지, 하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언젠가는 이 '새로움 자체'에도 익숙해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Jasmine (문화예술 통번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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