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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 Feb 09. 2023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게

  일곱 살 때의 일이다. 텔레비전을 좋아하는 나는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만큼 재미가 없었거나 당시의 사건에 비해 보잘것이 없어서 잊어버렸거나. 할머니는 나에게 텔레비전을 그만 보고 자라고 호통을 쳤다. 7살의 취침시간이라는 게 법으로 정해진 것일까? 물론 아니다. 나는 고압적인 태도로 말을 하는 할머니에게 조금만 더 있다 자겠다고 호방하게 말했다.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할머니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바닥으로 등짝을 때렸다.


  맞은 부위에 대한 통증보다 어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물리력까지 행사하며 의견을 묵살하는 행동에 대한 원망이 일었다. 무력에 굴복한 나는 잠자리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쓴 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할머니를 저주했다. 어린 나이에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할머니가 밉다는 마음속 외침이 전부였다.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할머니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까지 이르렀다. 내 눈앞에서, 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슬픔으로 떨리던 몸이 진정되고 눈물도 그쳐갈 때쯤 정신이 들었다. 죽는다는 게 무엇일까? 무엇이기에 사람들은 누군가가 죽으면 슬퍼하는 것일까?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당시의 나는 죽음을 꿈을 꾸지 않고 잠이 든 시간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나를 느낄 수 없는 시간, 모든 존재는 안녕하지만 나만이 사라진 세상. 엄청난 발견에 충격을 느낀 나는 숨이 턱 막히는 무력감에 휩싸였다. 할머니에 대한 미안함에 눈물이 흘렀다. 그런 무시무시한 생각을 한 나 자신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모든 생명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나이가 들면 꽃이 지듯 신체의 노화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끔찍한 고통을 수반하는 불치병이나 사고로 위장해 예상보다 빨리 오기도 한다. 이 말인즉슨 죽음은 정확한 때를 예측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때부터 죽음은 나에게 지대한 고민거리가 되었다.


  교회를 다닌 적이 있다. 그곳에서는 죽음은 끝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는 일이라 말했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곳에 간 누구도 돌아온 적이 없으니 그저 믿을 뿐이다. 하지만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방법에는 모순이 많았고 그것에 대한 의아함이 일었다. 종교가 있는지 알지 못하는, 원시시대의 삶을 살아가는 원주민들은 모두 지옥에 가야만 하는 것인가? 다른 종교를 믿으면 지옥에 가는 것인가? 회계를 하면 이생에서 지은 죄가 사하여지고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커지자 교회에 대한 회의가 들어 일요일마다 향하던 걸음을 멈추었다. 교회의, 성서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은 아니다. 종교에 대한 개인적인 신념이 깊어지지 않기에 결정한 일이었다.


  죽음이 분명한 삶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죽음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어쩜 이렇게 태연히 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


  삶에 정답이 없듯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에도 정답은 없다. 각자의 마음가짐이 현재를 만들고 만족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데 좋은 영향을 끼친다. 지금의 나는 죽음이 무섭지 않다. 흥(興)이 있으면 망(亡)이 있고, 성(盛)이 있으면 쇠(衰)가 있듯 죽음은 자연의 섭리이다. 끝이 어딘지 모르지만 유한한 삶을 죽음에 대한 걱정으로 소모하는 것은 지독한 시간낭비가 아닐 수가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삶을 살아라. 삶을 비관하지 말고 현재를 살아라.


  왜 살아야 되는지 타당한 이유는 없다. 우리는 우연한 기회로 세상에 존재하고 있고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는 본인의 몫이다. 물론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않다. 게다가 우리는 타인과 자신을 저울질하는데 이골이 난 존재들이니 자괴감에 빠지는 일 또한 잦다.


  부탄이라는 나라는 개인의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 중에 하나였다. 판별하는 지수에 대해 논란은 있지만 한때 ‘행복지수 세계 1위’를 했던 나라기도 하다. 그것은 그들에게 자긍심이었다. 하지만 생소한 나라가 행복지수 세계 1위라는 것에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부탄을 찾아왔고 그로 인해 불행이 시작됐다. 그들은 바깥에서 온 사람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SNS는 그것을 배가시키는 도구였다. 그들은 멋지고 예쁜 옷을 입고 크고 좋은 집에 사는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부러움은 질투와 열등감이 됐다.


  자신보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을 보며 우월감에 젖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그들을 비하하는 능력을 갖추었다. 과연 가진 것이 많을수록 행복한 것인가? 그것은 결코 아니다.


  돈이 많으면 행복한가에 대한 연구가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행복하지 않다는 일관된 결과가 나왔다. 선택할 거리가 많아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많은 돈이 있다고 없던 행복이 생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돈을 가져본 적이 없기에 결과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가질 수는 없지만 이따금 들리는 부자들의 자살 소식과 돈 때문에 일어나는 분쟁을 보면 이해가 된다.


  자신보다 못한 존재를 보며 우월감을 느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위를 향하려는 인간의 습성 때문이다. 10만 원을 가져 행복함을 느낀다면 100만 원을 가진 상대에게는 부러움을 느낀다. 1000만 원, 1억 원을 가진 상대는? 부러움을 넘어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과 상대에 대한 원망마저 피어오르고 자신의 처지에 대한 원망마저 들게 된다.


  행복의 사전적 의미는 복된 좋은 운수,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이다. 현재의 삶에 만족을 가지는 태도를 행복이라 규정하는 것이다.

  현재를 살며 나은 삶을 위해 천천히 이행하면 된다. 요행을 바라지 마라. 누군가의 성공도 한순간에 얻어진 것이 아니다. 운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겐 아쉬움으로 지나가고 준비된 자에게는 성공을 주는 기회가 된다.


  언젠가 찾아올 기회를 아쉬움으로 보내지 않고 반갑게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이 글을 읽는 당신과 나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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