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와 화합의 도구
작년 연말 즈음이었다. 반주자로 몸담고 있는 성당 성가대 주최로 MBTI 강의를 들을 기회가 생겼다. 강사는 그 성당 주임 신부님이었다. 정식 강사 자격을 가지고 계신다는 말에 흔쾌히 응했다.
단원들은 강의가 시작되기 전부터 MBTI 이야기로 들떠 있었다. 나에게 MBTI가 뭐냐고 묻는 지휘자에게 인터넷에서 무료로 검사한 결과를 말해 주었다.
“ESTP예요.”
지휘자는 놀라며 되물었다.
“E요? 선생님은 I 같은데.”
그런가요? 하며 웃었다.
지인들이 너도나도 MBTI 검사를 하고 결과를 나누던 시기가 있었다. 남들도 다 하니까 나도 해봐야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질문을 대충 읽어가며 답을 찍어 내린 결과가 ESTP였다. ESTP라는 약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결과를 읽으면서 ‘음, 그렇군.’ 했던 기억이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ESTP는 ‘사업가형’으로 분류되는 유형으로, 행동지향적 성향을 띄고 관찰력이 뛰어나며 존재감을 발휘하는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혈액형이나 각종 심리테스트 등 간략한 지표로 사람을 판단하는 방법들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나에게는 MBTI도 그저 재미 위주에 지나지 않았다. 검사한 그때 결과를 나누고 잊어버리고, 다음에 다른 사람이 물으면 생각나지 않아서 다시 검사하거나 결과를 찾아 기억을 더듬는 수준이었다. ESTP라는 결과가 나와 얼마나 맞는지도 생각해보지 않았으니 말은 다 한 셈이다.
어쨌든 내 MBTI는 ESTP였다. 간혹 “E요? 진짜요?”라는 질문을 듣긴 했지만 그때마다 “잘 모르겠지만 결과는 E였어요.” 하고 넘겼다. 그랬는데.
신부님께 검사용지를 받고 항목에 맞게 체크를 했다. E와 I의 점수가 반반으로 나왔다. 뭔지 몰라 고민하고 있으니 신부님께서 더 구체적인 질문을 주셨다.
“바깥에서의 활동이나 타인들과의 교류로 에너지를 얻나요? 아니면 피로해 지나요?”
내 답은 후자였다.
“‘아, 그때 그 말을 하지 말 걸’ 후회할 때가 많나요? ‘그때 그 말을 했어야 하는데’ 후회할 때가 많나요?”
내 답은 후자였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섞여 있을 때 먼저 말을 거는 편인가요? 말하지 않고 주위를 살피는 편인가요?”
역시 후자였다.
그 외에도 신부님께서 말씀하시는 E와 I유형 특징 중 I의 대부분이 마치 내 이야기 같았다. 강의를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극단적인 I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왜 인터넷 검사결과는 E고, 검사지에서도 두 유형이 비슷한 점수가 나왔던 걸까? 궁금해서 여쭤보니 ‘사회활동을 하면서 형성된 후천적인 부분이 검사에 반영되어 그런 경우가 많다’는 답을 주셨다.
나를 I 같다고 한 지휘자는 극단적인 E였다. 1주일 7일 중에 집 안에, 혹은 자신의 공간에 가만히 있을 때는 자거나 아플 때 외에는 없다고 했다. 반면에 나는 가능하다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집 안에서, 밖과의 접촉 없이 내 공간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싶다고 했다. 극과 극이 가장 앞에서 단원을 이끄는 지휘자와 오직 연주로 베이스를 받치는 반주자로 만나 단체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한 번도 부딪친 적 없이 몇 년을 파트너로 함께할 수 있었던 걸까.
결론적으로, 약 4시간의 강의를 듣고 찾은 나의 MBTI 성격 유형은 ISFP였다. 알고 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결과였지만, 내 본질을 깊게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다.
강의의 시작과 끝에 신부님께서는 MBTI를 통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점을 강조하셨다. ‘결과에 매몰되어 나는 이렇다, 저 사람은 그렇다고 판단하고 단정 지을 것이 아니라 나를 알고 상대를 앎으로써 배려하고 화합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비록 사람의 성격을 16개밖에 되지 않는 적은 수의 유형으로밖에 나누지 않는다는 취약점은 있지만, 확실히. 자신을 알고 남을 알기에 MBTI는 나쁘지 않은 도구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