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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 Dec 12. 2021

나의 오랜 나이 든 친구

강한섭이 세상을 떠났다.

내가 강한섭이란 이름을 듣자마자 떠오르는 모습은 늘 같다. 햇살이 따뜻하게 쏟아지는 그의 사무실에서 반짝이는 눈으로 무언가를 흥미롭게 듣고 또 이야기하는 모습들. 가느다란 몸 위에 빳빳하고 말끔한 셔츠를 걸친 채 그는 늘 세상의 흥미로운 부분을 찾아내는 사람이었다.


사실 강한섭에 대한 평가는 자주 호불호가 갈렸다. 그가 자주 과격한 도입부로 입을 뗐기 때문이다. 그의 서론은 누군가에게는 뜨악할 정도로 불편한 이야기였고,  다른 이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도입부였다. 그는 언제고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한 새로운 생각들을 끄집어냈고, 또 다시금 새로운 생각을 찾아 책과 영화 속에 진심으로 빠져들었다. 나는 자주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지 않고 '불호'라고 단정 짓는 이들이 안타까웠다. 그의 글과 생각은 시작이 강렬했지만, 중간은 유쾌했으며, 마지막엔 재기 발랄한 따뜻함이 느껴졌으니까.


생각해보면 아주 어렸던 스물한 살, 나는 강한섭과 마주한 채로 영화에 대한 생각과 지독한 삶에 대해 주절주절 잘도 떠들었다. 나의 나이 많은 친구는 단 하나의 편견 없이 내 이야기를 들었고, 중간중간 내 생각들을 캐물었다. 강한섭은 이따금 절대 웃음이 터지지 않을 만한 지점에서 호탕하게 웃었고, 또 침묵하고 싶어지는 순간에 입을 뗄 수밖에 없는 질문을 던졌다.


강한섭은 분명 나의 첫 번째 선생이자 가장 나이 든 친구였다.


푹 꺼진 얼굴로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날따라 나는 어떤 이야기도 꺼낼 수 없었다. "하고 싶은 게 없어요"라는 말만 반복한 채로. 강한섭은 "책을 좀 읽어 봐" "영화를 좀 봐봐" "새로운 걸 배워봐" "여행을 좀 가봐" 할 수 있는 모든 제안을 했고, 나는 고개를 계속해서 저으며 한숨 같은 변명만 읊조렸다. 그는 나의 슬픔을 빤히 바라보다가 옅은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 "그럼 푹 자"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너는 네 작품을 할 사람이야. 그냥 푹 자. 푹 자다 보면 일어나고 싶어질 거고, 일어나고 싶어지면 넌 다시 무언가 할 거야"


아직도 이 말에 위로를 받곤 한다.
스스로에게 또 나의 부모조차 하지 못 했던
단호한 선언은 그가 그였기에
전할 수 있는 위로였다.


긴 시간이 지나서도 여전히 그 자리에 그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 안도했다. 몇 년 전에 강한섭이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출퇴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학교 학생들과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다. 영상은 영상학과에서 만들었다고 하기엔 울퉁불퉁한 형태였지만 내용은 여전했다. 명징하고 또렷했다. 그랬던 그가 돌연히 떠났다. 아주 평화로운 일요일 뉴스를 통해 부고를 마주쳤다.


모든 학생들을 예술학도가 아닌 아티스트로 대하며 세상과 영화와 글을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확장하는 사람. 아마 강한섭처럼 날카롭고, 유쾌하고, 다정한 시선으로 세상과 영화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앞으로도 없을 거다. 강한섭은 마지막까지 반짝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나의 오랜 나이 든 친구이며, 나는 앞으로도 강한섭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


202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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