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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 Mar 27. 2024

사는 게 별 건가

01

손바닥으로 차가운 키패드를 누르면 숫자에 파란 불이 켜진다. 이틀 전에 바꾼 비밀번호 네 자리를 꾹꾹 눌렀다. '띠리링'하며 문이 열렸다. 우당탕탕 열 살짜리 여자 아이들이 현관까지 달려 나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한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어있다. 한바탕 뛰어놀았든가, 좁은 구석에서 자기들끼리 비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나 보다. 하나의 목소리가 늦었다고 외치자 아이들은 외투와 가방을 분주하게 챙겨서 나간다. 해맑게 소란한 아이들이다.


집안이 고요해지자 공기 중에 떠돌아다니는 고소한 기름냄새가 나고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소리 없이 분주한 남편이 주방에 있었다. "김치전이랑 쌀국수야. 막걸리도 사 왔어." 비 내리는 월요일 저녁에 이보다 좋은 메뉴는 없을 거다. 나는 남편이 시키는 대로 쌀국수 면을 체에 밭쳐서 끓는 육수에 살살 데쳤다. 딱딱했던 쌀국수 면이 흐물흐물 풀어졌다. 월요일을 마치고 돌아온 내 마음 같았다.


앞접시와 물컵을 식탁에 놓았다. 남편은 넷이서 짠-을 하고 싶어서 아이들용으로 옥수수수염차를 준비해 놓았다. 작은 준비성에 웃음이 났다. 5살과 10살은 김치전을 작게 잘라 오물오물하고 쌀국수를 후루룩 먹으며 중간중간 넷이서 짠-을 하며 배를 채워갔다. 우리 부부는 별 것 없는 일상을 나누며 천천히 막걸리 한 병을 비워갔다.


그러다가 지난 주말 남편이 친구들과 다녀온 여행 이야기를 식탁에 올렸다. 아이가 없는 기혼자의 삶이었다. 멀리서 지켜본 그들의 삶은 여가와 여행, 건강과 시간이 넘쳐흘렀다. 전생처럼 느껴지는 그 시간들이 마냥 부럽지는 않았다. 이제서야 내가 변했기 때문이다. 딸 아내 엄마 그리고 그냥 나를 긍정한다. 첫째 아이 나이만큼 시간이 걸렸다, 열 살 십 년. 순간 목구멍이 뜨거워졌는데 스스로가 기특했고, 동반자가 있어서 고마웠다. 어쩌면 둘이서 막걸리 한 병이 과했을지도 모른다.


사는 게 별 건가. 비 오는 날 김치전에 막걸리 마시며 거실에서 노는 아이들 구경하다가 잠드는 게 전부지, 뭐. 뽀득거리며 설거지하는 남편의 한 마디였다. 그러게 사는 게 별 건가. 저물어가는 하루 속에 들어앉아 눈맞춤하며 따뜻한 밥 한 끼 했으면 그뿐이지. 반짝이는 눈망울 같은, 그런 별 것들을 하나둘 오래오래 수집하며 살고 싶.


그나저나 남편의 꿈이 1인 사업가에서 전업주부로 바뀌었다고 한다.






사진: Unsplashmicheile hend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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