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둘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현실의 결혼은 해피는커녕 엔딩도 아니다. 마침표 대신 물음표를 그리는 진행형일 뿐이다.
이토록 예민한 남녀가 어떻게 한 지붕 아래서 살게 되었을까, 종종 궁금했다.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사랑 그리고 그 후의 일상>에서 단서를 찾았다. “결혼은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아직 모르는 두 사람이 상상할 수 없고 조사하기를 애써 생략해 버린 미래에 자신을 결박하고서 기대에 부풀어 벌이는 관대하고 무한히 친절한 도박.” 그렇다. 결혼은 나와 상대를 모르는 채로 서로를 결박해 버린 상태였다. 그러곤 상대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알아가야 하는 여정이었다.
같은 책에서 라비와 커스틴은 식기세척기에 접시를 포기는 방식이나 버터를 사용하고 몇 분 이내에 냉장고에 넣어야 하는지, 별 것도 아닌 사소한 일들이 서로를 자주 피곤하게 만든다. 어쩜 이렇게 세세하게 스토리에 분노를 심어 놓을 수 있는지 놀라웠다. 더 놀라운 건 나의 일상과 꼭 닮았다는 거다.
방의 온도가 서늘한 걸 좋아하는 사람과 따뜻해야만 잠이 드는 사람. 야식을 먹지 않는 사람과 야식을 좋아하는 사람. 잔잔한 음악을 듣는 사람과 힙합을 듣는 사람. 나들이를 좋아하는 사람과 집 밖을 싫어하는 사람. 전자는 나고, 후자는 남편이다. 우린 정말 다르다. 둘의 차이를 나열하자면 한 장을 빼곡하게 채울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너무나 게으른 작자가 되고 말 것이다.
남편과 차이 중 가장 괴로웠던 점은 싸우는 방식이었다. 서로 다른 싸우는 방식 때문에 더 싸웠다. 화가 나면 나는 얼음처럼 차가워지는 사람이었고, 남편은 불타오르는 사람이었다.
얼음은 냉동실처럼 어둡고 닫힌 공간에 들어가고 싶어 했다. 불은 혼자 타오를 수 없으니 자꾸 나를 데려다 앞에 앉혀 놓았다. 함께 사는 사람과 싸운다는 건 도망갈 곳이 없어진 비상사태였다.
동시에 살면서 누구와 갈등도 제대로 해결해 보려 노력한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남편과 갈등은 제대로 해결하지 않으면 온전한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들숨에 한번, 날숨에 또 한 번 공기가 까슬거렸다.
얼음과 불은 만나 얼음 두 개가 되거나 큰 불이 되기도 했다. 어떤 날은 물이 되기도 했다. 찰랑거리는 물이 된 날에는 사이좋게 삽을 들고 물길을 만들어 묵은 감정을 흘려보냈다.
부부 싸움을 거듭할수록 불과 얼음보다 물이 되는 횟수가 잦아졌다. 싸움의 기술로 인정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해보다 인정이 쉬웠다. 자기 자신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게 인정의 시작이었다. 덕분에 남을 이해하겠다는 욕심은 가볍게 버렸다. ‘이해가 안 돼’는 저 멀리 우주로 보내고 ‘내가 그랬구나’, ‘너는 그렇구나’하고 인정을 곁에 뒀다.
“그와 커스틴은 결혼을 하고, 난관을 겪고, 돈 때문에 자주 걱정하고, 딸과 아들을 차례로 낳고, 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고,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서로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고, 몇 번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진짜 러브스토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