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참을 수 있었던 존재의 무거움
1999년, 당시만 하더라도 저녁노을이 지면 캠퍼스에는 통기타 소리가 울려 퍼졌다.
2003년, 군대를 제대하고 학교에 돌아와 보니, 모두들 도서관에서 책에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학교 축제에 아무도 관심이 없자 학생 회장은 도서관 앞에서 확성기를 들고 시위하듯 학생들을 밖으로 끄집어내려고 일장 연설을 해 대었다.
2006년, 학교를 졸업하기 전 원하던 회사에 2개월 단기 인턴으로 채용됐다. 화장실 가는 것도 꾹 참으며 열정을 불태우는 모습에 감동(?)을 했는지 옆 자리 과장님이 한 가지 조언을 해 주었다.
"인턴 마치고 채용공고 날 때까지 공부만 하지 말고 다른 곳에서 잠시라도 경력을 쌓는 게 좋을 거예요."
친구들은 하나 둘 졸업 전에 취업을 하였다. 나는 졸업식을 마치고 잠시 여행을 다녀왔다. 그때는 지금처럼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게 없었다. 군대를 다녀와서 졸업을 할 때까지는 말하는 대로 모두 이루어지는 '아브라카타브라'의 시절을 살았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 그런 날들이 언제 다시 올진 모르겠으나 그런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처음으로 지원서를 내었던 회사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몇 번의 낙방은 있었지만, 졸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취업이 된 거여서 한 회사에 입사한다는 것이 그리 어렵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원하는 회사에 입사할 때까지 잠시 지나쳐 가는 회사라 생각했기에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어느덧 뜨거웠던 햇살이 조금씩 누그러지면서 원하던 회사에서 채용을 할 시기가 된 것 같았다. 그동안 매일 11시 넘어서까지 야근을 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적은 월급과 잦은 회식 그리고 술을 강요하는 등 퇴사의 이유는 넘쳐 났다. 호기롭게 사표를 내니 마치 팀장님도 기다린 것처럼 바로 사표 수리를 해 주셨다. 보통 사직서를 내고 퇴사를 하기까지 최소 한 달을 더 근무해야 하는데, 내 기억으로는 사표를 내고 그 다음날부터 회사를 안 나갔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회사 생활을 어떻게 했길래 그랬을까 하는 조금은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당시 회사의 생리를 잘 알지 못했던 나로서는 바로 사표가 수리된 것이 마냥 좋기만 했다.
한 동안 집에서 열심히 책을 팠으나, 원하는 회사의 채용 공고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르고 '올 해는 채용 예정이 없습니다.'라는 공지를 보게 되었다. 실망이 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안 먹던 술을 먹고 담배를 피워댔다. 나는 가끔 너무 괴로워 미칠 것 같을 때면 '차라리 뇌보다는 폐를 희생하자.'라는 마음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브랜드의 담배를 사서 피운다.
다시 입사 지원을 해야 했다. 그러나 아무 회사에나 이력서를 넣고 싶지는 않았다. 잘 골라서 연봉도 남들 만큼 주고, 야근도 안 시킬 것 같은 회사를 골라 지원했다. 혹 시내를 걸어 다닐 때, 밤 10시 넘어 아직도 사무실에 불이 켜 있는 회사는 지원 명단에서 제외시켰다.
어느덧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지고, 가슴속 깊이 찬바람이 몰아치는 계절이 돌아왔다. 입사 지원서는 벌써 100개를 훌쩍 넘어 있었고, 이미 나의 취업 기준 마지노선은 붕괴되어 있었다. Copy & Paste를 하며 회사명만 바꿔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지원했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자, 나는 점점 대한민국 사회에서 잊혀져 가는 벌레가 되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이 사회에서는 12월 32일이 되면 아무도 나를 기억 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매일 거울 앞에 선 나의 눈빛은 이미 총기를 잃었다. 초점을 잃은 눈으로 츄리닝을 입고 매일 아침 거울을 대하는 것만큼 나의 가슴을 짓누르는 것도 없었다. 아무리 미소를 지어 보이려 해도 근심과 걱정, 불안과 초조로 인한 중력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양쪽 입가는 항상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최종 임원 면접을 보게 되었다.
"마지막 할 말 있으면 해 보세요."
인사 상무님은 책상에 올려진 서류를 뒤적거리며 무심한 말투로 질문을 던졌다.
'올해 안에 취업 못하면 나는 끝이다.'
'다시 우리 집 조그마한 감옥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감형을 받고 세상 밖으로 나올 것인가?'
나는 취업 못한 죄인처럼 판사 앞에 서서 마지막 발언을 앞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마치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듯이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대고 진심을 담아 마지막 발언을 하였다.
"정말 '일'을 하고 싶습니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호기롭게 사표를 낸 뒤로 겪었던 수많은 심적 고통의 현장들이 필름처럼 지나쳤다. 정말 '일'을 하고 싶었다. 눈시울이 조금은 뜨거워졌지만, 나는 눈물을 꾹 참았다. 마지막에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심이 통했을까? 나는 겨우 막차를 타고 새로운 2007년을 맞이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기뻤던 건 당시 결혼을 약속했던 지금의 아내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결과를 모두 아는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차피 언젠가는 취업이 될 텐데 왜 그리 마음을 졸이며 나 스스로를 괴롭히며 살았나 하는 후회도 있다. 그러나 그때는 미래를 알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힘들었던 백수 시절을 거치면서 느꼈던 한 가지 교훈.
'미래는 알 수 없는 것. 어차피 회사에 발을 디디는 순간 중노동의 연속이니 놀 수 있을 때 놀자.'
사실 육아휴직을 하며 가끔씩 불쑥불쑥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이 든다. 그러나 그때마다 과거 백수 시절을 졸업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평안을 누렸던 때를 떠올린다. 그리고 '걱정 마 잘 될 거야. 지금까지 잘 해 왔잖아.'하며 나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이 엄청난 자유와 여유를 또다시 놓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