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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기 Mar 27. 2021

점점 분명해 지는 것에 관하여

쇼핑과 미루는 습관

 어릴 적 나는 쇼핑 때문에 어머니께 자주 불평하였던 기억이 있다. 한창 사춘기 시절 패션에 대한 관심이 늘었지만 어머니는 옷을 내 마음처럼 사주지는 않으셨기 때문이다. 게다가 친구들은 나이키나 리복처럼 브랜드가 있는 옷과 신발 그리고 가방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기에 불만이 쌓여 있었다. 중학교 시절 한 친구로부터 일명 짝퉁 옷을 입고 다닌다는 이유로 놀림을 받았던 기억도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저렴한 가격의 브랜드 제품을 살지언정 '짝퉁'은 사지 않는다.


 쇼핑을 하다 보면 즐거움보다는 피곤함이 몰려올 때가 있다. 시간이 남아서 백화점에 잠시 들렸다가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는 쇼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쇼핑의 대부분은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다. 봄이 되었으니 옷 한 벌 사볼까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대부분 옷의 어딘가가 심하게 오염되었거나 매우 낡게 되어 버릴 수밖에 없을 때 한 벌씩 구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필요에 의해 구매할 때도 가능한 다양한 제품을 비교하며 구매하다 보니 시간이 상당히 걸리는 편이다. 가격, 품질 그리고 나름의 감성까지 충족하는 제품을 찾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이사를 하면서 인테리어에 많은 신경을 쓰게 되었다. 아이들도 제법 컸고, 신혼 때 제대로 장만한 가구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식탁, 옷장, 책장 등 가구에서부터 조명, 러그, 액자 등 각종 인테리어 용품까지 사야 할 물건도 많다. 이럴 때 나름 도움이 되는 나의 기질이 있다면 바로 '뒤로 미루는  습관'이다. 예전에는 그 날 할 일을 가능한 그 날 마치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일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한 뒤로 미루는 편이다. 해야 할 일을 다한다고 그다음 날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일은 계속 생겨 난다. 마찬가지로 지금 사야 할 목록에 대한 구매를 모두 마쳤다 할지라도 내일 사고 싶은 물건과 쇼핑 욕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쇼핑할 때 가능하면 한 번에 모든 것을 구매하기보다 최대한 뒤로 미루는 편이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 자주 말씀하셨다. "사고 싶은 물건은 한 번에 사는 게 아니란다. 시간이 지나면 사고 싶은 마음이 또 올라오기 때문이지." 물론 어린 나는 옷 가게에서 한 번에 사고 싶은 옷들을 모두 사고 싶어 했다. 어머니께서는 몇 번 정도 나의 쇼핑 욕구를 채워 주신 적이 있었는데, 결국 내 마음은 어머니 말씀처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금 기존 옷들이 마음에 안 들어지고 새로운 옷을 사고 싶음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었다. 그런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필요를 채우기 위한 쇼핑의 피곤함도 있고, 어차피 이 모든 것을 다 구매한다고 구매 욕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나는 가능한 구매를 미루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구매를 미루면 좋은 점이 있다. 내가 구매하고 싶은 그 제품이 정말 필요하고 쓸모 있는 제품인지 검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정말 필요한 물건은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계속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러나 충동적으로 일어난 구매 욕구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그런 제품은 구매해봐야 나중에 쓰레기만 될 뿐이다.


 오늘날 모든 것은 빠르고 쉽게 이루어진다. 오늘 저녁에 구매한 제품이 내일 새벽에 도착한다. 결제도 간편하다. 스마트폰에 지문만 갖다 대거나 간편하게 4~6자리 숫자만 입력하면 된다. 금액에 따라서는 이마저도 생략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세상에서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이 바로 얻어지지 않는 것은 나름의 고통으로 다가온다. 인생의 목표나 꿈같은 것들도 빨리 이루어지는 게 아닌 줄은 알지만 마음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인내나 기다림이 더할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 기다리고 바라다보면 정말 그게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인지 이루고 싶은 것인지 분명 해지는 순간이 있다. 꿈을 가능한 한 빨리 이루고 싶은 마음은 소중하다. 그러나 그 마음이 고통이 되고 있다면 때로는 뒤로 미루는 습관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직장생활을 하며 이렇게 글을 쓰는 순간이 그렇다. 처음에는 글을 쓰고 강연을 하는 작가들을 동경하며 글쓰기라는 것을 시작했다. 그래서 글을 빨리 쓰고 난 다음 완성도 채 안 된 글들을 출판사에 제안하기도 했다. 물론 모두 거절을 당하거나 답변 조차 받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은 그런 동경과 뭔가 되고 싶은 마음은 잠시 내려놓고 글을 부담 없이 취미로 쓰고 있다. 그러다 조금씩 내가 글 쓰는 것 자체를 좋아함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내가 쓴 글로 돈을 벌고 유명해질 수 있을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도 시간을 내서 글을 쓰는 나를 볼 때, 디스크 협착증으로 허리가 아파 앉아 있기 힘든 순간에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나를 볼 때, 내가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동안 많은 취미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글 쓰기가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분명해 지고는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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