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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기 Aug 31. 2021

번 아웃(Burn Out)에 관하여

번 아웃 항생제를 찾아서...

  어느 날 아침의 일이다. 평소와 다름없이 일어나 세수를 하고 아침밥을 먹었다. 회사에 갈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와 지하철을 탔다. 여느 때처럼 9시가 조금 안 되어 사무실에 도착했고 노트북을 켰다. 그사이 쌓여 있던 메일 목록이 주르륵 펼쳐졌다. 메신저 창에서는 업무 관련 질문과 요청들로 알림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하루에 약 100여 개 정도의 메일을 받는다. 그리고 하루에 적게는 3번 많게는 5번 정도 유관 부서와 미팅을 한다. 여기에 더하여 윗사람들과 동료들로부터 각종 업무 요청을 받는다. 요청 중에는 바로 답변이 가능한 내용도 있지만, 파일을 여러 개 열어 놓고 확인을 거친 후에야 답변이 가능한 내용도 있다. 물론, 어떤 내용은 몇 번의 미팅을 거쳐야 해결 가능한 것도 있다. 사실 하루에 메일 100개를 읽고 처리하는 데만도 하루 8시간 정도 걸린다. 그런데 유관 부서와 미팅이 매일 같이 있기에 근무 시간에 메일을 다 읽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지난 몇 년간 메일을 다 읽고 답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메일을 다 읽는 일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가능했다. 여기에 추가적인 업무 지시가 내려오니 평일 저녁은 물론이고 주말까지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주말에는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쉬고자 하는데, 쌓여 있는 업무가 생각나 마음이 늘 불편하다.


 이런 상황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를 시작한 어느 날, 갑자기 내 마음속에서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일하기 싫다. 정말 하기 싫다." 처음에는 속삭이듯이 들리는 것 같았는데 점점 외치는 소리처럼 들렸고 심장 박동도 조금씩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여느 때 같이 노트북을 켜고 밀린 메일을 읽고 업무를 처리해 나가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전에도 일이 하기 싫다는 감정은 있었지만,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몸까지 말을 듣지 않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날 오전 내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노는 것처럼 보일 수는 없어 무의미하게 모니터를 응시하며 마우스와 키보드에 손만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점심때 식사를 하지 않고 잠시 나가 바람을 좀 쐬고 오후부터는 일을 시작했지만 너무나 힘든 하루였다.


 무기력한 하루하루가 이어져갔다. 나름 다시 한번 힘을 내 보기 위해 퇴근 후 땀을 내면서 운동도 해보고, 조용히 방 안에서 명상도 해 보았지만 효과는 그때뿐이었다. 다시 출근을 하고 업무를 마주하면 급격하게 탈진이 되었다. 업무는 계속 밀려들어오는데 몸과 마음이 말을 듣지 않아 답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님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번 아웃과 관련된 내용이었는데 공감되는 내용이 많았다. 특히 내가 마음의 소리에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마음을 조종하려고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마치 뛰어가다 넘어져서 상처가 나 울고 있는 어린아이에게 "울지 말고 어서 일어나!"하고 다그치기만 하는 나를 보게 되었다. "넘어져서 아프지? 어디가 아프니?" 그 한마디를 못 해 주었던 것 같다.


 번아웃은 아직 진행 중이다.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다. 최근 이직 제안도 많이 받고 있고 지금의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다. 하지만 이직을 하더라도 현재의 문제를 어느 정도 마주하고 해결한 다음에 옮기고 싶다. 그러지 않는다면, 같은 문제가 언젠가는 반복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즘 탈진하는 마음 상태가 될 때마다 마음에게 묻는다. "혹시 다른 거 뭐 하고 싶은 거 있니?" 그때마다 마음속 묻어 두었던, 하지만 실천을 못하고 있는 생각들을 하나씩 꺼내어 본다. 그리고 그중에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골라서 주말에 하나씩 해 보고 있다. 그중에 하나가 카약이다. 특히 경치가 좋은 호수와 강에서 카약을 타고 있으면 자연 앞에서 내 문제가 스르르 녹는 것을 경험한다. 최근 기회가 닿아 오래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연기 수업도 받고 있다. 대본을 받고 연기 연습을 할 때 일에 대한 걱정과 불안 대신 그 캐릭터에 몰입해서 나만의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상상을 하며 행복해하는 나를 발견한다. 카약과 연기 둘 다 시작한 지는 몇 주 되지 않았지만 번아웃을 치료하는 항생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여유가 된다면 점찍어둔 지역에 작은 땅을 구입해 나와 주변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는 공간도 만들어 나가고 싶다. 이건 당장 하기는 어려운 프로젝트이지만 생각을 구체화해 나가고 하나씩 현실로 만들어 내기 위해 이것저것 알아볼 때면 아드레날린이 솟는다.


  일은 나에게 경제적인 안정을 준다. 덕분에 나와 가족은 편안하게 살았지만, 나 스스로는 긴장과 불안 속에서 평안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다 보니 슬프게도 푸르렀던 내 마음의 숲은 점점 타들어갔고 이제는 까만 재만 남게 되었다. 지금은 업무를 잘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황량한 내 마음에 다시 초록 나무를 심고 가꾸어야 할 시기인 것 같다. 그래야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언젠가는 더 잘할 수 있고, 전체적인 삶도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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