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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기 Sep 22. 2021

번 아웃에 관하여 (2)

휴식의 끝에서 만난 해결책들.

 한 동안 번아웃으로 글을 쓰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증'은 정말이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마치 내장을 모두 쏟아낸 말린 오징어처럼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바닥에 누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제주도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혼자서. 추석은 좋은 기회였다. 게다가 항공권은 생각보다 저렴했다.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적절한 날자와 시간을 골라 비행기를 예약하고, 숙소를 잡고 제주도로 날아갈 그날만을 기다렸다.


 제주도가 나를 치료해 줄 거라는 희망은 없었다. 힘들 때 제주도로 떠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어떤 도움을 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혼자 있고 싶었다. 다만 골방에 틀어박혀만 있다 보면 할 수 있는 것이 제한된다. 책 읽기와 스마트폰 하기. 독서까지는 괜찮은데, 책을 읽다가 가끔씩 스마트 폰을 손에 잡게 되는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30분, 50분, 90분씩 시간이 훌쩍 흘러가 버리는 마법이 발생한다. 혼자 떠나는 여행길에 연락 수단 없이 가족과 소통을 단절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혼자 있지만 계속 어디론가 움직일 수 있는 곳을 택했다. 그곳이 나에게는 제주도였다.


 제주도에서 하고 싶은 일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우도 한 바퀴 걷기, 두 번째는 제주도 자전거로 일주하기였다. 우도는 보통 전기 자전거나 전기차로 여행을 하는 듯했지만 걸어서도 여행이 가능해 보였다. 그리고 제주도의 해변 도로를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고 싶다는 계획은 오래전부터 갖고 있던 로망 중 하나였다. 다만 우도는 그렇다 쳐도 제주도는 생각보다 큰 섬인지라 계획된 휴가 기간 동안 제주도를 한 바퀴를 돌려면 자칫 여행이 아닌 노동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자전거 코스를 1/4 정도로 상당 부분 줄이기로 했다. 제주도에서까지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나를 소진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그저 느리게라고 바다를 바라보며 천천히 유랑하듯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나를 끝까지 소진하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반대로 나를 소진했던 정도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씩 생기기 마련이다. 제주도에 도착해서 나는 걷고 또 걸었다. 다행히 제주도의 날씨와 풍경은 현실의 고민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었다. 짙고 푸른 바다와 석탄처럼 검은 현무암 그리고 싱그러운 초록의 나무와 풀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나의 마음에 안정제를 투여하는 것만 같았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짭조름하면서도 신선한 제주의 바람이 오염된 나의 폐와 뇌를 정화시켜 주었다. 도시에서 쌓여왔던 긴장감과 분노 그리고 무기력함이 바람과 함께 서서히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우도에서 배낭을 메고 5~6시간 정도를 계속 걸었다. 오랜만에 걷는 거라 그런지 발목부터 종아리까지 통증이 올라오고 발바닥에 물집이 잡힌 것 같았지만 왠지 모르게 몸과 마음은 건강해지는 것만 같았다. 길을 걷다가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잠깐 휴식을 취했다. 아마 처음인 것 같았다.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있었던 그 시간이. 인생에서 생각이 많아야만 좋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생각을 비우는 시간도 필요함 몸으로 느꼈던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우도에서 반나절을 걷고 그다음 날은 애월로 향했다. 애월로 가기 전 첫 숙소로 잡았던 성산일출봉에서 버스를 타고 한라산 사려니 숲에서 잠시 내렸다. 오랜만에 사려니 숲을 걸으니 몸과 마음이 정화됨을 느꼈다. 저절로 깊은 들숨과 날숨이 가능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니 마음이 더 안정되감을 느꼈다. 그리고 들이마시는 산소가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마치 산해진미를 먹듯 사려니 숲에서 뿜어 나오는 신선한 공기를 정신없이 흡입했다. 사려니 숲에서의 산책을 마치고 제주 공항 근처 자전거 렌털 샵에 들러 오래전부터 타고 싶었던 자전거인 브롬톤(Brompton)을 빌렸다. 대여료도 서울보다 저렴했다. 공항에서 애월까지 자전거를 타고 석양을 바라보며 해변 도로를 달렸다. 수평선으로 내려가는 태양을 바라보며 지는 것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인생에서 성장하는 것만큼이나 서서히 지는 것도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자연을 바라보며 하나 둘 내 안에 퇴적물처럼 쌓여 있던 것들을 비워내자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동안 아무것도 하기 싫어 덮어만 두었던 일기장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하나씩 제주에서 느꼈던 생각들을 적기 시작했다. 현재 내가 마주한 문제들과 어떻게 하면 현재의 무기력함에서 조금 나아질 수 있을지 하나 둘 생각나는 것을 적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나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나의 문제에 너무 집착했던 것이다. 우울과 무기력에 빠져 허우적 될 때 다른 사람을 돌 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내 문제에만 집중할수록 그 문제가 점점 더 커져 보이고 그 문제에 눌리기만 했다. 오히려 이러한 증상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돌릴 때 헤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이런 시간을 배려해 준 아내와 가족들에게도 행복을 선물하기 위해 뭔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중 하나가 집안일이다. 무기력하게 누워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아내를 위해 청소와 설거지 빨래를 해 놓기로 했다. 요즘은 내가 재택을 하니 퇴근하고 오는 아내에게 기쁨이 될 것만 같았다.


 두 번째 문제는 내가 문제를 마주하거나 해결하려 하지 않고 시간에 기댄다는 것이다. 회사일을 함에 있어 항상 시간은 부족하고 일은 많다 보니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보다 시간이 해결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문제는 시간이 저절로 해결해 주지 않고 계속 문제가 커져가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회사에서 겪는 몇 가지 문제를 나열해 보고 하나씩 해결책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중에 하나가 끊임없는 대안 찾기였다. 내가 마주하는 문제들은 하나의 대안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이럴 때 대안을 한 두 개만 생각하면 해도 안 된다는 좌절감에 빠질 수가 있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끊임없이 대안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시간적으로는 짧지만 정신적으로는 긴 휴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집에 오자마자 몸을 움직였다. 진공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이고, 스팀 청소기로 묵은 때를 벗겼다. 회사뿐 아니라 집안에 있던 집수리와 관련된 문제들도 하나 씩 해결해 보기로 했다. 아내가 나를 보며 조금 달라진 것 같다고, 다음에도 또 휴가를 보내 주어야겠다고 한다. 추석이 끝나고 회사 업무에 복귀하면 아마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제주에서 보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내 삶에 작은 변화와 결심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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