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ing Home.
글을 쓰는 한 작가의 이야기다. 그는 작가가 되기 전 한 건축회사에서 근무했다고 했다. 건축 설계를 담당했던 그는 자신의 일에 만족감 느끼지 못했다. 남들이 볼 때 대규모 프로젝트 설계를 진행하는 그를 부러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건물 설계의 일부만을 담당했기에 성취감을 느끼기는 어려웠다고 했다.
과거 구두를 만드는 사람은 가죽 선택부터 재단 그리고 구두의 완성까지 처음부터 마지막 과정을 직접 했다. 하지만 '분업'이라는 시스템이 도입된 후로는 각 제조 단계별 가죽을 구매하는 사람, 재단을 하는 사람, 봉제를 하는 사람, 염색하는 사람이 각 단계를 맡아하게 되었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서는 이러한 분업으로 인해 생산성이 향상되었다고 했고,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영화에서는 이러한 분업으로 인간이 기계화되었다고 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기분 좋게 퇴근한 날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몇 년이 지난 뒤 퇴근길 지하철에서 듣던 노래가 있었다. 당시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일을 했지만 돌아온 건 인정보다는 질책 그리고 성취감보다는 자책감이었다. 숨 쉬기 조차 힘든 만원 지하철에서 손잡이에 겨우 몸을 의지한 채 집으로 향하곤 했었는데 그때 김윤아의 'Going Home'을 들으면서 지쳐있는 나를 위로하곤 했었다.
학창 시절에는 공부를 하면 열심히 한 만큼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직장 생활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내 뜻대로 일을 추친하기 어려울뿐더러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 그에게는 우선순위가 낮은 일일 수 있다. 나는 왼쪽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상사와 동료는 오른쪽이 맞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일은 더디 진행되고 만성적인 정체가 일상이 되곤 한다. 성취감이란 걸 느끼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최근 달리기로 건강을 회복한 한 분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분은 젊은 시절 과로와 과음으로 젊은 나이에 병원 신세를 졌다고 했다. 가까스로 치료를 통해 회복한 후 시작한 것이 달리기였다고 한다. 처음부터 잘 달릴 수는 없었지만 조금씩 달리는 거리를 늘려나갔고 마라톤 대회에도 참여할 만큼 실력이 늘었다고 했다. 이제 그는 아침마다 3~5km를 달린 후에 느끼는 성취감으로 하루를 산다고 한다.
사실 이 글을 쓰려던 목적은 두 가지였다. 우리는 왜 직장에서 만족감이나 성취감 같은 긍정적인 감정보다는 자책감이나 불만족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주로 느끼는지와 어떻게 하면 긍정적인 감정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을지 글을 쓰면서 답을 찾고 싶었다. (가끔 생각이 복잡할 때는 글을 쓰다 보면 생각이 하나씩 정리가 되고 그러다 보면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답을 찾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의 거의 끝나가는 이 시점 직장에서 성취감이나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글 하나를 남겼으니 그저 오늘 하루 뭔가 하나는 이룬 것 같아 나름의 성취감과 만족감을 느끼며 잠들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