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레바스: 빙하의 표면에 생긴 깊은 균열.
제가 아버지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이 생긴 건 우연히 아버지 핸드폰에 남겨진 음성통화를 듣게 되면서 입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군대 입대 전 또는 복역 중 그것조차 아니면 제대 후 어느 시점인 것 같습니다.
당시 저는 집에 혼자 있었고, 부모님은 잠시 외출 중이었습니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띵동, 음성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버지 핸드폰에서 나온 소리였죠. 저는 호기심이 들었습니다.
'과연 저 안에는 무슨 내용이 있을까?'
'누가 음성메시지를 남겼을까?'
'엄마가 아닌 내가 모르는 여자의 음성이면 어떡하지...?' 등등.
여러 가지 생각이 복잡해지면서 판도라의 상자를 열듯 조심스럽게 메시지 함을 열었습니다.
"OOO님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희 회사가 살았습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메시지 함을 열자 들린 건 낯선 남성의 목소리였습니다. 추측컨대 40대 중 후반 또는 50대로 보이는 남성의 음성이었습니다. 말투는 매우 공손했고,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닌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분이 왜 그런 메시지를 남겼는지, 아직도 정확한 자초지종은 잘 모릅니다. 다만 나중에 어머니를 통해서 들은 얘기로 추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당시 너희 아빠가 병원 공사를 맡게 되면서 여기저기서 찾아오고 전화가 왔는데, 단 한 번도 밖에서 만나적이 없으셨다."
내용인즉슨, 아버지께서 병원을 지을 때 업체 선정을 맡으셨는데, 그때 건설사에 계시는 분들께서 수주를 받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아버지와 접촉을 시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모두 사무실 안으로 모시고 공정하게 입찰을 진행하였고, 저는 그렇게 선정된 업체가 공사를 잘 마치고 아버지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리고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아버지가 계셨던 병원을 방문했을 때 만나는 분마다 해 주신 말씀을 통해 이러한 추측이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훌륭한 아버지를 두었구나."
병원에서 경비를 맡으시는 분부터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까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말을 저에게 해 주었습니다. 사실 요즘 시대에는 아버지처럼 공정한 절차에 맞추어 일을 진행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정직'한 사람들이 원칙 없는 시대에서 생존하여 어느 정도 성공 궤도에 오르는 사례가 기사화되고 책으로 쓰일 정도로 '정직'과 '공정'이 희귀한 시대였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셨던 그 모습, 그리고 한 사람으로부터 진심 어린 감사의 말을 들었던 아버지에게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지금껏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진심 어린 감사의 표현을 들어 본 적은 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한 번 책상에 앉으면 6시간이고 10시간이고 내리 앉아 공부를 하셨습니다. 물 먹는 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 등을 제외하면 정말 꿈쩍도 않으시고 공부에 매진하셨습니다. 당시에 제가 중학생과 고등학생이었으니 아버지 나이도 40살이 훌쩍 넘었을 때였습니다. 그렇게 몇 달간 공부를 마치고 계획하신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49.195 킬로미터를 완주한 것처럼 하루 이틀은 링거를 맞으셨습니다. 지금의 저와 똑같이 아니 저보다 더 늦은 나이에 회사를 다니며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 때론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제가 중학생이었을 때 아버지가 방에서 공부를 하시면 저는 거실에서 TV를 보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한 번도 저에게 "너도 들어가서 공부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아버지께서 링거를 맞고 누워 계시면 친척 분들이 와서 아버지의 어린 시절 얘기를 해 주며, "너도 아버지처럼 열심히 공부해야지."하고 잔소리만 남기고 가셨지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부담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저는 꿎꿎히 TV를 보았고 컴퓨터 게임을 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3이 되기 몇 주 전 일입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순간 공부란 것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 스스로 눈빛이 변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제 방안에 있던 게임 잡지와 만화책들을 모두 정리했습니다. 그 후로도 아버지처럼 오랜 시간 집중해서 공부를 할 수는 없었지만, 뒤늦게 공부에 몰입하면서 아버지의 피가 제 몸속에도 흐름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존경하지만 서른여섯 살인 지금도 아버지와 저 사이에는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음을 느낍니다. 마치 빙하의 표면에 생긴 깊은 균열인 크레바스(crevasse)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크레바스를 넘어야 함을 알면서도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 회사로 놀러 간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서점에 들러 동화책도 사고 맛있는 해물 찌개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OO야, 이번 주말에는 경복궁으로 놀러 가자."
저는 경복궁이 뭐하는 곳인지 몰랐지만 아버지와 함께 어딘가로 간다는 것 자체로 기분이 들떴습니다. 그리고 한 밤 두 밤 세며 그 날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주말이 되었습니다.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고, 어머니는 저에게 전화를 바꾸어 주었습니다.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OO야, 미안하다. 이번 주말에는 못 갈 것 같네."
"괜찮아요. 다음에 가요." 저는 Cool하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당시에는 Cool하다는 표현이 없었지만, 그렇게 대답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몇 주 후 아버지는 저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OO야, 이번 주말에는 시간이 될 것 같은데 어린이 과학관 갈까?"
"좋아요."
그곳 역시 정확히 뭐하는 곳인지 몰랐지만, 저는 마냥 좋았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약속도 지켜지지는 못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이후로 아버지는 저에게 약속이란 것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월이 조금 더 지나 어느덧 저는 동화책보다 '호환(호랑이에게 당하는 화), 마마(천연두)'보다 더 무서운 빨간색이 둘러진 테이프를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인터넷이 있지만 제가 어릴 적에는 비디오테이프가 동영상을 볼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당연히 어린이에게는 빨간색 테이프를 빌려 주면 안 되지만, 당시에는 "삼촌이 빌려 오라고 했어요."라고 하면 18금 비디오를 대여해 주는 곳이 있었습니다. 저는 떨리는 마음으로 '리틀 도쿄'라는 영화를 빌려 동생과 함께 보았습니다. 숨을 죽이며 보고 있는데, 밖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후다닥 테이프를 꺼내어 까만 봉지에 담아 제 가방 속에 숨겼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들어오시자 공범인 동생이 테이프가 어디 있는지 일러바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어이가 없어서 동생에게 달려들었는데, 아버지는 동생과 싸우는 저를 말리신 후 저를 호되게 혼내셨습니다. 저는 잘못을 뉘우치기보다 동생을 원망하며, 무릎 꿇고 2시간 동안 아버지의 설교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제 삶에 조금씩 간섭하기 시작했고, 제가 하는 대부분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셨습니다. 머리에 무스 바르는 것, 향수를 뿌리는 것, 밤새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 등등.
어느덧 얼굴에 여드름이 나기 시작하고 부모님보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좋아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그 날도 저는 농구에 한창 빠져 있었습니다. 다음 날 시험이 있었지만, 농구를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친구와 집 근처 공원에서 신나게 농구를 하고 있는데 저 멀리 어두운 얼굴을 하고 걸어오는 한 남자가 보였습니다.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와 눈이 마주친 저는 도망갈 수 없었습니다.
"따라와!"
저는 결박되어 끌려가는 죄수처럼 아버지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집 근처에 도착할 즈음 저 멀리 나뭇가지 한 뭉텅이가 보였습니다.
"저 중에 하나를 집어와라."
아버지는 무거운 저음으로 한 말씀하시고는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아~ 이 나뭇가지로 맞겠구나.'
그 날따라 나뭇가지는 모두 굵은 것 밖에 없었습니다.
'이걸로 한 대만 맞아도 뼈 부러지겠다.'
저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적당한 나뭇가지를 고르기 위해 이것저것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가녀린 것을 가져가도 안 될 것 같고, 너무 두꺼운 것을 가져가면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중 제 눈에 띄는 한 나뭇가지가 있었습니다. 적당한 두께에 '굵은 가시'가 송송 밝힌 나뭇가지였습니다. 그걸로 한 대 맞으면, 가시가 종아리에 박혀 피가 철철 흐를 것 같았습니다. 저는 비장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그 나뭇가지를 골라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그 가시나무를 두 손으로 공손하게 전해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잠시 두 눈을 감으시더니, 아버지의 전매특허인 '2시간 설교'를 이어나가셨습니다. 비록 '가시나무' 전략은 성공하여 한 대도 맞지 않고 끝났지만, 2시간 동안 무릎 꿇고 설교를 들으며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금도 가끔은 아버지와 저 사이에 대화가 별로 없는 게, 어릴 적 들었던 '2시간 설교 트라우마'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5~6학년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아버지와 저의 관계는 빙하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빙하기 끝에 해빙기가 찾아온 건 고3 때 공부를 다시 시작하여 마침내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였습니다. 아버지는 대학생이 된 저에게 많은 자유를 주었습니다. 용돈을 올려 주신 것은 물론이고, 그 돈으로 귀를 뚫고, 미용실에서 X-Japan의 Hide처럼 새 빨간색으로 머리를 염색하고 다녀도 아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혹시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 아래 사진에 있는 사람이 X-japan의 기타리스트였던 Hide입니다.)
대학교 2학년, 해방감에 그동안 묵혔던 욕망을 모두 분출하며 황금기를 보내고 저승사자에게 끌려가듯 군대에 입대하였습니다. 군 제대 후에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했고, 어학연수와 교환학생을 다녀오며 아버지로부터 많은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 후 회사에 입사하였으나 몇 달 후 퇴사하고 한 동안 백수로 지내면서 아버지와의 관계가 잠시 소원해졌습니다. 아버지 잘못은 아니었고, 그냥 제가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았던 시기였기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아버지는 저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보시며 조용한 응원을 보내주고 계셨습니다. 다행히 몇 달 후 한 회사에 취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회사에 입사하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상대방 누군가와 계속 논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논쟁은 회사에서만 해야 하는데 아버지와도 했습니다. 당시 지금의 아내와 결혼식 하는 날짜를 두고도 아버지와 심한 논쟁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추운 겨울보다 날씨가 따뜻한 봄에 결혼식을 올리길 바라셨고, 저는 봄부터는 업무가 너무 많이 몰려 그나마 일이 없는 연말 또는 연초에 하기를 원했습니다. 아버지가 자식 생각해서 해주신 말인데, 당시에 저는 그것 가지고도 아버지와 논쟁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제가 상견례 장소를 잘못 예약하여, 저희 부모님과 장인 장모님께서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뻘뻘 나는 뜨거운 여름날 에어컨 하나 설치되어 있지 않은 골방에서 상견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제가 일이 너무 많아 그곳에 가보지도 않고 전화로 방 하나를 달라고 예약했더니, 점심과 저녁 식사 사이에 식당 아주머니들께서 주무시는 방 같은 곳을 잡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도 아버지에게 "일을 그렇게 밖에 처리 못하냐?"라고 한 소리 심하게 듣고 한동안 아버지와의 사이가 틀어졌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모두 제 잘못이고 부끄럽게만 느껴지지만, 당시에서 아버지와 서로 마주 보고 말도 안 할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지금까지 아버지와 사이가 어떻게 멀어지게 되었는가에 대해 어린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가 몇 가지 기억나는 일들을 적어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적은 것 외에도 중학생 시절 아버지한테 대들었다가 추운 겨울 한밤중에 반팔, 반바지만 입고 쫓겨나서 새벽 5시까지 옥상에서 추위에 바들바들 떨었던 사연 등 마치 나무의 잔가지처럼 아버지와 저 사이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을 모두 끄집어내어 생각해 봐도, 그런 일들 때문에 아버지와 저 사이에 크레바스가 생긴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결혼 후 좋은 아버지가 되어야겠다는 일념으로 '아버지 학교'라는 프로그램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곳입니다. 아버지 학교에서는 매 주 수업이 끝나고 숙제가 하나씩 있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 쓰기, 아버지에게 편지 쓰기, 뭐 그런 거였던 기억이 납니다. 숙제를 해 오면 운영자 측에서 그중에 몇 개를 골라, 앞에 나가 다른 참석자 앞에서 읽게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는 매번 숙제를 정성껏 했지만 한 번도 선정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니, 제 이야기가 너무 '평범' 했던 것 같았습니다. 앞에 나와 발표를 하시는 분들 중에는 어린 시절 부모가 이혼을 했거나, 때로는 아버지의 가정폭력에 시달렸거나 그런 이유 때문인지 현재도 자녀가 있지만 아버지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고, 아내와는 현재 이혼 협의 중에 있어 주변 사람들의 마지막 권유로 아버지 학교에 나온 분들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그런데서 아버지한테 빨간 테이프보다 걸려서 혼난 이야기, 공부 안 하고 농구하다 발각돼서 가시나무 들고 갔다가 다행히 맞지는 않고 2시간 동안 무릎 꿇고 연설을 들었던 저의 사연은 모두 너무 '평범'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평범한 일 때문에 아버지와 거리감이 있다는 것이 제삼자의 눈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합니다.
며칠 전 저는 우연히 아버지가 제 딸, 그러니까 손녀의 발을 닦아주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마치 난초의 잎을 세심하게 닦아내듯 손녀의 발가락 사이사이에 묻은 모래들을 정성껏 씻겨 내고 있었습니다.
순간 '아버지에게 저런 모습이 있어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혼하기 전부터 위로는 증조할머니 그리고 아래로는 동생들까지 모두 책임을 지시느라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치열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장남의 모습에서, 이제는 여유를 되찾고 틈만 나면 손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어린이집 하원 시간을 기다리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이 어쩌면 '우리 아빠'의 본모습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저 사이에 크레바스가 만들어진 건, 어떤 축적된 일련의 사건들 때문이 아니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나면서부터 어느 순간 '아빠'를 '아버지'라 불러야 한다는 밀물처럼 다가왔던 거부할 수 없는 의무감 같은 것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 '어바웃 타임'의 엔딩 부분에는 생을 마감하는 아버지와 어린 시절로 마지막 시간여행을 떠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시 '아빠와 아들'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이 세상 모든 아버지들의 마음에 공감을 주는 명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에게도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아빠 품에 안겨 발을 닦았던 그 시절로 잠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