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조 할머니

by 노용기

오랜 만에 증조 할머니를 뵈었다. 고뿌라진 허리에 종종 걸음을 하며 초코파이를 사들고 오셨던 증조 할머니. 한 동안 그분을 뵙지 못하였다가 장례식장에서 영정 사진으로 다시 뵙게 되었다. 장례식장을 들어 설 때 사람들은 조용했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 정확히 말하면 친척들의 수군거림이 들리는 것 같았다. 증조 할머니께서 가장 사랑하셨던 내가 한동안 찾아 뵙지 않다가 오랜만에 나타나자 다들 나에게 대해 손가락질을 하는 것만 같았다.


증조 할머니는 나를 장손이라는 이유만으로 보물 단지 다루듯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해 주셨다. 어린 시절 나는 그분의 등에 업혀 유치원 등교 차량을 기다리곤 했다. 그 때마다 동네 어른들이 지나가며 한 마디 씩 했다. “할머니 힘들게 다 큰 손자가 내려오지... 쯧... 쯧...” 나는 마냥 그 분 품안에 있는 것이 좋았고, 증조 할머니도 힘든 내색 한 번을 안하셨기에 나를 업고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그 때는 알지 못했다.


증조 할머니는 항상 내 편이 되어 주셨다. 내가 오락실에서 형들에게 위협을 당하고 있을 때도, 친척들의 나의 행동을 나무랄 때도, 증조 할머니는 전후사정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내 편이 되어 주셨다. 국민학교 5학년이었을 때 일이다. 당시 부모님은 분가를 하였고, 그 공간을 시골에서 올라온 친척들이 차지 하고 있었다. 나는 증조 할머니 댁에 자주 놀러가 밥을 먹곤 했는데, 하루는 밥 투정을 하는 나를 큰 고모가 “그럴거면 니 집가서 밥먹어라.”하며 크게 혼을 내셨다. 그 때 할머니께서 큰 고모 가족들에게 한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니들이 나가라!”


우리 집에는 친척들간에 갈등이 있었다. 나는 그 갈등의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알지는 못한다. 확실한 것은 그로 인해 부모님과 나와 동생은 분가를 하였고, 그 자리를 잽싸게 큰 고모네와 작은 아버지네가 차례로 차지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사정으로 인하여 나는 돌아가시기 몇 년 동안 부득이 증조 할머니를 찾아 뵙지 못하였다. 증조 할머니께서 하늘 하나로 가시기 전 한 동안은 몸이 많이 쇄약하여 화장실도 스스로 가지 못하셨다고 들었다. 그 자리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하고 증조 할머니를 하늘 나라로 보내 드린 것이 아직도 많이 후회가 되고 죄스럽다.


지난 설 명절에 차례상에는 증조할머니의 영정 사진이 올라 왔다. 나는 아직도 증조 할머니 품에 안겨 있을 때 느껴졌던 따뜻함이 그립다. 그리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지금, 내가 과연 내 자녀들을 증조 할머니께서 나를 사랑 해 주셨던 만큼 사랑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볼 때 자신이 없을 때가 많다. 이렇듯 증조 할머니는 나에게 큰 사랑을 주신 분이시다. 나에게 소원이 있다면 천국에서 증조 할머니를 뵙고 사죄하는 것과 그 분의 품에 다시 안겨 보는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직장 다니며 MBA 하면서 느낀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