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째 딸아이가 네 살이 되자 쉽게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아이는 원하는 것이 있어 아빠와 엄마에게 말을 하는데, 나와 아내는 딸아이가 하는 말이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면 나는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거꾸로 아이에게 물었다.
"물 달라고?"
"장난감?"
"쉬 마렵다고?"
그럴 때마다 딸아이는 "아니야" 소리치며 급기야 짜증을 내며 울기 시작했다. 나도 당시에는 가뜩이나 회사에서 짜증 나는 일도 많은데 퇴근 후에 집에 오자마자 아이가 짜증을 내며 울기 시작하면 같이 아이에게 화를 냈던 기억이 있다. 아이의 짜증과 나의 짜증이 서로 극에 달할 때는, 지금은 부끄러운 얘기지만 아이의 멱살을 잡고 "똑바로 말하란 말이야"하며 화를 냈으니 말이다.
이 밖에도 아이가 늦은 밤에 자지 않겠다고 떼를 쓸 때, 백화점에서 계속 에스컬레이터를 타겠다고 떼를 쓰며 바닥에 들어 누울 때, 계속해서 무언가를 사겠다고 자기 고집을 부리며 부모의 말을 전혀 듣지 않을 때가 많았다. 아이가 점점 부모인 나와 아내의 말을 듣지 않고 끊임없이 떼를 쓰고 울어대자, 급기야 나도 '매'라는 것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와 아내가 지방의 어느 산을 등산할 때의 일이다. 지방에 있는 산을 가다 보면 절이 있고, 그 주위에는 다양한 기념품을 파는 상점들이 있다. 나는 그곳들을 둘러보면서 '이곳이라면 적합한 사랑의 매가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참에 적당한 굵기와 단단함 그리고 길이를 가진 사랑의 매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 하나 살까?"
나는 아내에게 동의를 구하기 위해 물었다.
내가 사랑의 매로 아이를 훈육할 때 아내가 말린다면 아이에게 혼선을 줄 수 있기에 동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아내는 며칠 전 국내 어느 육아 전문가 강의를 듣었는데, 그때 들었던 얘기를 나에게 하며 아이를 때리며 훈육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충분히 말로 교육할 수 있는 상황에서 매를 드는 것은 너무 편의적 방법일 뿐, 아이의 마음을 올바로 되돌리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내의 말을 들으니 공감이 되었다. 사실 말이 좋아 사랑의 매지, 매라는 것은 부모가 편리하게 아이를 제압하는 방법일 뿐 실제 아이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나 역시 어릴 때 매를 맞고 자랐지만, 태도가 변화되기는커녕 서서히 몸집이 커지면서 부모님께 반항까지 했으니 말이다. 즉, 매라는 것은 사용기한이 매우 한정되어 있고, 그 효과도 부정적이다.
나는 사랑의 매를 찾는 것을 그만두고, 그럼 어떻게 하면 아이가 떼를 쓰고, 짜증을 부리며, 부모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이는 미운 네 살이 되어 갈수록 미운 짓만 골라하는 것 같고,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것 같았다. 또한 한 번 울기 시작하면, 마치 방공 사이렌처럼 몇십 분가량을 쉬지 않고 울어 댔다. 뭔가 변화가 필요했다.
다음은 워싱턴 주립대학교의 심리학 교수이자 '내 아이를 위한 사랑의 기술 - 감정 코치'의 저자 존 카트맨의 일화이다.
그는 세 살이었던 딸과 함께 친척집을 방문하고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때 딸이 아빠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얼룩말 인형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 인형은 이미 짐칸에 실은 후였다. 카트맨 박사는 아이에게 다음과 같이 상황을 설명했다.
"아가야, 미안해 지금은 얼룩말을 줄 수가 없구나. 비행기의 다른 칸에 있거든."
그래도 아이는 계속 징징 거리며 얼룩말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다시 아이에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래, 착하지. 하지만 얼룩말은 지금 여기 없어. 비행기 맨 밑에 짐칸에 있어요.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에는 아빠가 가져올 수 없어요. 미안해."
그래도 아이는 계속 "얼룩말! 얼룩말 줘!"하며 떼를 쓰며 울기 시작했다.
그는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꾹 참고 떼를 쓰는 아이에게 대안을 제시했다.
"네가 얼룩말을 원하는 것을 알지만, 지금 여기엔 없어. 그러니 대신 아빠가 네가 좋아하는 그림책을 읽어 줄게."
"싫어 싫어. 나는 얼룩말을 갖고 싶단 말이야. 얼룩말을 줘! 지금 당장!"
상황이 이쯤에 이르자 주변의 승객들과 승무원까지 '어떻게 좀 해봐요!'하는 표정으로 카트맨 박사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나 슈퍼맨이 아니었다. 그리고 계속 울어대는 아이를 보자 자신도 속이 상했다. 그때 퍼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 얼룩말을 줄 수는 없지만 얼룩말 다음으로 가장 좋은 것을 줄 수 있어. 바로 아버지의 위로 말이야!' 그리고 그는 화를 가라 앉히고 부드럽게 말했다.
"지금 얼룩말이 있었으면 좋겠지?"
"응!" 딸은 슬픈 듯이 말했다.
"아빠가 너를 위해 얼룩말을 가져다주지 못해서 화났구나?"
"응!"
"지금 당장 얼룩말을 가져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그렇지?"
"응! 지금 얼룩말이 보고 싶어."
"아빠도 지금 네가 얼룩말을 껴안을 수 있게 이리로 데려 올 수 있으면 정말 좋겠어. 그보다도 비행기에서 얼른 내려서 네 인형들이랑 베개가 가득한 크고 부드러운 침대에서 우리가 편히 누울 수만 있으면 훨씬 좋겠다. 그렇지?"
"맞아!"
"하지만 얼룩말은 비행기의 다른 곳에 있어서 지금 데려올 수 없어. 그것 때문에 우리 딸 많이 실망했구나."
"응!"
"그래서 정말 미안해."
이렇게 말하자 아이는 서서히 차분해지기 시작했고,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나직이 몇 번 투덜거렸지만, 이내 곧 잠잠해졌고, 얼마 후 잠이 들었다.
카트맨 박사는 이 날의 경험을 통해 아이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관심을 돌리기보다, 아이의 기분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나는 존 카트맨 박사의 책 '내 아이를 위한 사랑의 기술 - 감정코치'를 읽고, 내 아이에게도 적용해 보기로 하였다. 아이가 마트에서 어떠한 인형을 가지고 싶다고 떼를 쓸 때, 그 전에는 이미 인형이 많다고 상황을 설명하거나 단호하게 안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책을 읽을 후로는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며 대화를 하였다.
"저 인형이 가지고 싶지?"
"응. 가지고 싶어."
"아빠도 너에게 저 인형을 사주고 싶다. 그러면 우리 딸이 많이 좋아할 텐데."
"응. 저거 사줘."
"그런데 오늘은 인형을 사지 못할 거 같아."
"싫어 싫어! 인형 사줘."
"그래, 우리 딸이 저 인형을 많이 좋아하는구나."
"어, 나 저 인형 좋아해."
"그런데 아빠가 인형을 안 사줘서 속상하겠다. 아빠도 어릴 때 너처럼 속상할 때가 있었어."
"아빠도?"
"그럼 아빠도 그때 많이 속상했지. 그래서 너 맘을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아."
"...."
"하지만 오늘은 저 인형을 사지 못할 것 같아."
대화는 계속 이런 식으로 이어졌다. 나는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그리고 아이가 수긍하지 않으면 다시 아이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말을 하였다. 아이에게 화를 내거나 단호하게 안된다고 말할 때보다 대화의 시간은 더 늘어났지만, 아이의 마음을 공감하며 대화하기의 효과는 실로 놀라울 정도였다. 나는 아이에게 인형을 사주지는 않았지만, 아이는 떼를 쓰거나 울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와 나는 감정적으로 더 가까워진 느낌마저 들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아마 어릴 적에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한 번쯤은 매를 맞고 혼나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한 번 떠올려 보자. 정말 잘못했을 때는 잘못을 뉘우친 적도 있었겠지만, 대부분 마음이 위축되고 낙심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 아무리 사랑의 매라도 할 지라도 공감이 없는 매는 아이를 주눅 들게 하고, 움츠려 들게 할 뿐이다. 그래서 당분간은 그 행동을 하지 않겠지만, 적당한 시기가 지나면 또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본성대로 행동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아이를 진정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려고 한다면 사랑과 공감이 우선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해주고 자신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따르지, 절대 매를 들고 혼을 내고 심지어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 군대를 다녀온 아빠들은 알 것이다. 선임 중에 매점에 데려가서 초코파이 하나라도 더 사주며 위로해 주고 힘내라고 하는 선임을 따르지, 매번 실수할 때마다 어둡고 구석진 곳으로 데려가 언어적 신체적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겉으로는 따를진 몰라도 진심으로 따르지는 않는다. 즉, 매는 순간적으로 복종하게 할 뿐 마음속 깊이 순종하게 하지는 못한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이 건강하고, 밝은 심성을 가진 아이로 자라길 바란다. 그리고 어디에서든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커 나가길 바란다. 그런 점에서 부모로서 우리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으로 훈계를 해야 한다.
물론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이를 혼내지 않고 지낸다는 것이 쉽지 않다. 나 역시 하루 종일 회사에서 힘들게 일하고 왔는데, 딸과 아들 두 자녀가 서로 장난감을 놓고 싸우다 울면서 집안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만들게 여전히 마음이 힘들다. 퇴근 후 두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지 다짐을 했다가도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때론 내 마음에 분노가 쌓일 때도 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는 아이의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시간적 마음적 여유가 필요하다. 또한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사랑으로 양육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최근 나는 딸아이와 한 대화를 잊지 못한다. 나는 아이에게 동생과 다툴 때 절대로 동생을 때리거나 하면 안 된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아빠도 안 때리니 너도 동생을 때리거나 하지 말고 말로 잘 타일렀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자 아이는 나에게 "아빠도 옛날에 나 때렸잖아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아, "아빠가? 언제?"라고 아이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이는 "예전에 아빠가 나 밤늦게 잠 안 잔다고 자로 내 손 때렸잖아요."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나는 그때 한 동안 아이가 고집도 많이 부리고, 떼도 엄청 많이 쓰고, 게다가 그 날은 잠도 안 자고 계속 울어대길래 한 번쯤은 아이를 호대게 혼을 내서 버릇을 고쳐 주어야겠다고 생각해서 급기야 30cm 플라스틱 자로 아이의 손바닥을 몇 대 때리며 훈육을 했다.
때린 사람은 기억 못해도 맞은 사람은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는 지난 여름에 내가 한 일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는 아이가 말도 더듬더듬 잘 못할 때인데, 아이는 그 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아내와 등산을 하며 사랑의 매를 찾으러 나선 것도 그즈음이고, '내 아이를 위한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읽었던 것도 그 때즘이다. 나는 그 대화 이후로 아이에게 매를 든 것을 반성했다.
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가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나의 의견을 상대방이 수긍할 수 있게 말할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어느 곳에서든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고, 내 뜻과 맞지 않는 다고 해서 화를 낸다면 어느 곳에서도 환영을 받을 수 없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어느 곳에 가든지 환영받고 두각을 나타내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 공감 능력, 즉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었으면 한다. 이러한 나는 공감을 바탕으로 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아이가 갖기 위해 부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매를 들거나 혼만 낸다면, 아이가 대화의 능력을 갖출 기회를 잃고 만다. 반대로 아이가 말을 듣지 않는 상황에서도 아이의 말을 경청하고 공감하고 대화를 시도한다면 아이는 커서도 그 경험을 살려 훌륭한 커뮤니케이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대화로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육아와 관련하여 많은 고민들이 있지만 답은 이미 다 나와 있다. 바로 사랑으로 기르는 것이다. 사랑으로 아이를 이해해 주고, 사랑으로 아이를 품어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인생에 정답이 없는 것이 비해 육아에는 정답이 있으니 그나마 나은 편이다. 그러나 사랑으로 아이를 기른다는 것이 말과 생각보다 행동으로 실천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이 글을 쓰는 중간에도 나의 아이는 떼를 썼고, 나 역시 혈압 상승을 경험했으며, 지금 쓴 글에는 반하는 행동을 할 뻔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글을 참고는 하되 혹여 나는 이렇게 아이들을 양육하고 있지 못하다고 낙심하는 분은 없길 바란다. 나 역시 아래 성동일의 대사처럼 딸아이에게 좀 봐달라고 하는 부족한 아빠이자 매일 조금씩 아빠 되는 법을 배워가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한 아빠일 뿐이니 말이다.
잘 몰라서 그래.
아빠도 태어나면서부터 아빠가 아니잖아.
아빠도 아빠가 처음인데,
그러니까 우리 딸이 좀 봐줘.
(성동일, 응답하라 1988)